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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Mar 06. 2020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과는 일하지 않는다.

프리랜서 생존 규칙 1


프리랜서가 되면서 종종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과 법인카드의 위대함이 부러웠던 적이 많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을 내가 누리는 시간과 업무방식의 자유로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을 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놈의 코로나가 뭐라고 결국은 프리랜서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언제 다음 일이 들어올 지 모른다는 프리랜서(aka. 예비백수)의 최대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확실하게 일을 받을 수 있는 클라이언트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다양한 트랙의 일을 유지하기로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로 미술을 가르치는 과외를 하는 일과, 출판사에서 맡아하는 번역 일, 그리고 본업인 디자인 일을 2:2:4정도의 비율로 유지하고 있었다.


계속 새로운 일로 전환을 할 때 효율이 올라가는 사람이라 이 방식이 꽤 나와 잘 맞았고 본업인 디자인이 만약 끊긴다 하더라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번역 일은 꽤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일이였다. 여기에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하고 싶은 쇼핑이나 돈을 모으는 일은 본업에서 해결해나간다가 나의 멋진 계획이였다.


코로나 따위야 집안에서 일하는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 했건만.. 내 돈줄인 클라이언트들은 결국 모두 밖에서 일을 하는 거였지.. 모든 미팅과 상품 출시가 미뤄지니 당연히 예정 되었떤 디자인 일도 딜레이 되고 아이들은 개학까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과외는 무슨 과외, 예상도 못한 번역까지 당장 급한 출판이 아니면 모두 스톱이 되었다.


거기다가 이사 일정이 겹쳐 지출이 많이 잡혀 있는 상황..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생각했을 때 멈췄어야 하는데 라는 막막함과 함께 갑자기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너무 부럽기 시작했다. 재택으로 근무를 하는 친구, 회사에 일이 없어 매일 아무것도 안 한 다는 친구 (그래도 월급날은 돌아오잖아!).


돈의 노예와 자유로운 거지 중에 후자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유로운 거지'의 전제조건은 최소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벌이를 동냥으로 충당할 수 있다는 점이겠다. 동냥까지 막혀버린 거지에게는 자유가 없다. 돈의 노예와 그냥 노예 중에는 돈의 노예가 낫지 않나..


그렇게 멘탈이 나간 사이에서 어떻게 이사가 되는 지도 모르고 짐을 나르던 중 오랫동안 간간히 일해왔던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웹을 한 번 싹 갈아엎으려 하는데 UX 설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서 해주기로 했으니 비쥬얼 부분만 맡아달라는 요청이였다. 지금 내가 뭘 가릴 처지인가 알겠다고 하고 무리해서 이사 바로 다음날 짐정리도 되지 않은 채 미팅을 잡았다.


아, 일단 어떻게든 일이 들어왔으니 해결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계속 내 안을 빙빙 돌았다. 대체 뭐지, 뭐지 미팅도 가기 전부터 나를 채우는 이 불쾌함.


사람.. 나는 그 사람을 너무 싫어하고 있었다. 대표님과는 아무것도 모르는 20살 시절부터 우연한 계기로 피팅 모델을 시작으로 번역, 디자인까지 외주로 받아 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인연을 가져온 분이였다. 대표님이 운영하는 브랜드가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입체로까지 커지는 과정을 지켜봤고 무엇보다도 그 제품들을 좋아했다.


그치만 그 사람과 일하는 건 정말 너무 힘들었다.


우선 6년 가까이 합을 맞춰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시간 약속을 지켜서 작업 지시사항을 넘겨주신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겨우 받은 작업 지시사항에는 오류가 너무 많아 일일히 내가 팩트체크를 하며 커뮤니케이션을 다시 해야했다. 한 두번이 아니라 6년 내내.


그렇게 점점 사람을 존중하기가 어려워졌고 그 때 쯤 이 사람과는 일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절을 시작했지만, 마치 이별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살라'라고 메세지를 고하던 대표님은 급할 때면 다시 나를 찾았고 나는 또 일을 해드렸다. 너무 급해 내가 해주지 않으면 정말 큰일날 것처럼 말하는 대표님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로는 '이거 뭐 하나만 간단한거'라는 말을 너무 자주 하셨다. 물론 어떤 때는 실제로 '뭐 하나만 간단한거'이기도 했다. 밤 열 한시에 한 시간 내로 해달라고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걸 대표님은 몹시도 마음에 들어하셨다. 이미 '그런 간단한거'는 바로 해드리겠다고 전날 대답한 나는 새벽 5시라는 '복잡한 시간'에 들어온 '간단한 일'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일은 내 역량을 최대한 쓰는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최소한을 쓰게 되었다. 대표님에게 연락이 오는 것 만으로도 큰 스트레스가 되고, 또 마음을 고쳐 먹고 잘해드리려 하다가도 짜증이 확확 나서 최소한의 역량만 써서 결과물을 만드는 내 모습을 보면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왠지 좀 더 체계적으로 제대로 생각하고 맡기시는 것 같은데? 애정이 있던 브랜드이기 때문에 나간 미팅에서 나는 2시간만에 정신적 번아웃이 왔다. 분위기가 안 좋았거나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이유없이 힘들었다. 일이 힘든건 당연하지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한 번 더 따로 둘이서만 미팅을 가졌다. 내가 자진해서 대표님 사무실을 찾아갔다. 지금까지는 일만 좋지 사람이 싫으니 굳이 더 진취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좀 큰 맘 먹고 잘 해보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대표님을 좋아했다. 20살의 나에게는 대표님이 너무 예쁘고, 똑똑하고, 멋있고 세련되어 보였다.


이제는 처음 만났을 때 대표님 나이에 훌쩍 가까워진 나에게 대표님은 하나도 멋있지가 않았다. 모든 지점에서 프로같지 않았다. 일을 지시하고 진행하는 방식, 대화방식,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도, 피드백을 주고받는 방식.. 나는 20살에서 한참을 앞으로 달려왔는데 대표님은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 함께 미팅한 디자이너분이 제시한 몇 가지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확장성과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제안하자 대표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전문가라는게 있잖아.. 우리같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전문가의 눈은 다르다고 생각해...'


그렇구나. 대표님의 시야에서 나는 20살 때 10만원 받고 로고를 그려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필요할 때만 찾고, 살갑고, 밥 먹자고 이야기 하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일을 해 오면서 우리는 같이 밥 한 번,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필요할 때만 카톡으로 업무를 주고 받으며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10년 가까이 같이 일 한 사람과 얼굴 한 번 보지 않았다'라는게, 우리 관계의 요약이였다. 우리는 서로가 거쳐온 시간을 단 한 번도 공유한 적이 없었고, 10만원에 만든 로고라는 거래 하나의 연장선을 그저 유지만 겨우 하고 있었다.


미팅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가 쏟아졌다. 그 사람은 나를 모르고, 나도 그 사람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도 궁금하지가 않았다. 대표님은 한 번도 나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매번 대표님이라는 사람이 조금씩 궁금했다. 그리고 몇 년만에 다시 만난 대표님과의 자리에서 그 궁금증이 싹 사라졌다.  


내가 프리랜서의 최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싫은 사람과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였다. 싫고 재미없는 일을 하는 건 괜찮다. 그것도 집에서 좋은 음악 듣고 개를 껴안고 하면 기분 좋다. 그치만 싫은 사람과 일하는건 같이 비싼 걸 먹고 좋은 호텔에서 자도 싫다.


돈의 노예에서 그냥 노예로 추락한다하더라도 이것만큼은 지켜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일적인 관계고 비즈니스적 관계여도, 최소한의 애정과 관심을 품기 어려운 사람과는 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서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과는 아무리 잘 만들어봐도 이 감정이 배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일을 거절했다. 안 한다는 건 안 한다는거일 따름인데, 예상했던 대로 내 말을 조금씩 계속 비틀어 속을 슬슬 긁는다. 이러다 정말 특정 인물 공포증이 생기게 되겠어. 이미 잘 나가는 브랜드가 내가 도움을 못 준다고 망할 리도 없는데, 대꾸하는 것도 그만두고 그냥 저 잘게요 라고 말을 하고 랩탑을 닫아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갑자기 기분이 상쾌했다. 당장 돈도 없고 냉장고에 반찬도 하나 없었지만 새로 이사 온 집이 있고 친구가 있고 개가 있었다. 일이야 또 따오면 된다. 만 원짜리 일 백 개보다는 백 만원 짜리 일 한 개가 낫다. 그치만 최소한의 규칙은 지켜야 한다.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과는 일하지 않는다. 트럼프 명함을 1억주고 만들어 주느니 1원을 받고 1억명의 명함을 만들어 주겠다. (아닌가. 1억이라면 트럼프 명함이라도 파야하나?)


며칠만에 처음으로 마음에 안정이 온다. 프리랜서 생활의 첫 번째 규칙을 이제서야 만들었다.


Rule No.1 Don't work with someone you cannot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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