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설픈 비건 Mar 19. 2020

프리랜서를 위한 플랫폼은 없다

대놓고 을이 되라니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돌입한 프리랜서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쯤 코로나가 터졌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을 줄 알았는데 천재지변인 천재지변인지, 주기적으로 받던 일이 모두 잠정적 휴업모드로 돌입했고 새로운 일도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초심으로 되돌아가 내가 다시 깔은 앱은 숨고. 숨고는 디자인이나 번역같은 업종부터 과외, 설치, 시공 등 여러가지 분야의 '숨은 고수'를 고객과 연결시켜주는 시스템이다. 고수로 등록하고 활동을 시작하면 내가 선택한 분야의 요청서가 쏟아진다. 견적을 보내면 상대방은 5가지의 견적을 받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서비스가 공짜냐, 아니다 꽤나 비싼 유료 서비스다. 요청자로 로그인하여 여러가지 분야에 요청을 보내고 견적서를 받는 것인 무료이지만, 이 견적을 보내는 '고수'는 최소 7만원이 넘는 금액을 충전해야 한다.


분명 몇 개월 전에 사용했을 때만 해도 월에 7만원 정도면 무제한으로 견적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규정이 바뀌었는지 이제는 건당 충전한 금액에서 캐쉬가 차감되게 되어있다. 견적서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요청에는 비싼 가격이 붙어 7500캐쉬, 이미 견적서가 꽉 차있는 낮은 경쟁의 요청에는 2500캐쉬 정도가 측정된다.


상대방이 읽지 않은 견적은 환불이 되지만 사실 대부분의 요청자는 견적을 읽은 다음 답장을 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환불이 되지 않는다. 사실상 10건 정도 견적을 보내면 1건의 계약을 따올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 특히 특별한 사항 없이 최소한의 요구만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숨고 플랫폼에서는 결국 가격으로 경쟁을 하게 된다. 커튼 설치, 에어컨 설치나 이사와 같이 확실한 업무가 정해졌을 때는 가격 경쟁이 성립하지만 디자인이나 과외 번역과 같은 서비스의 '질'을 측정하는 데에 애매모호함이 있는 영역에서의 견적 측정은 참으로 어렵다.


내 단가를 계속해서 깎아야지만 일을 따올 수 있는 시스템에서 끊임없이 인터넷에서 적정 가격을 검색하고 숨고내의 평균 가격을 확인하지만 사실 일의 스콥의 넓은 '디자인'에서는 평균가가 하향평준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찬 물, 더운 물 가릴 때인가 오만원 짜리 명함도 하고 오십만원에 상세페이지 10개도 만들고.. 일이 없는 반백수 프리랜서에게 선택권은 없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다. 안전거래로 거래를 하고 있던 한 명함 디자인 요청자가, 완성된 명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환불을 요구한 것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받아보고 싶다는 요청에 필요한 정보와 로고를 받아 시안을 몇 가지 보내고 컨펌을 받은 뒤, 재질을 추천해줘 종이까지 컨펌을 받아 진행한 건이라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어딘가 처음부터 쎄했던 일이였다. '회사 대표'라고 표기해달라는 요청자의 명함에는 회사 이름이나 주소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로고는 원본 파일이 없어 저화질의 jpg를 던져줘서 깨질 것 같다고 전달하니, 아예 다른 로고를 보내며 이걸로라도 해달란다. 아무래도 어딘가 꺼림침한 용도의 명함을 만드는 것이 분명해 보이나 지금 내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상대방의 윤리의식까지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새로 받은 로고도 화질이 좋지 않아 로고가 깨질 것이라 하였지만 상관 없단다. 제작 업체에서 한 번 더 화질 문제로 연락이 와 한 번 더 전달했지만 괜찮단다. 그래서 진행했다. 일주일만에 명함을 받은 요청자는 로고가 깨졌다며 환불을 요청했다.


허 참.


하지만 프리랜서의 삶은 원래 정글 속에 홀로 낙오된 원숭이 한 마리. 매번 다른 기준이 적용되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디자인' 영역. 이래서 계약서와 선입금이 중요하다. 나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숨고 플랫폼을 통해 안전거래를 진행했고, 나는 어쨌든 맡은 업무를 충실히 완료했으며 상대방의 환불 근거는 내가 이미 여러 번 주의를 준 사항이였다. 이런 일로 감정소모를 하고 싶지 않아 플랫폼에게 중재요청을 하겠다고 전달했다.


대화 내용과 시안, 배송 확인 자료까지 준비하여 숨고에 연락을 했다. 그런데 왠걸, 내가 받은 대답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였다. 안전거래에 걸려 있는 금액이 나에게 입금이 되려면 상대방이 기한날 확인을 눌러야 한다는 것. 상대방이 확정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도 돈을 받을 수 없다.


'아니 그러면, 이 안전거래라는게 양쪽에 안전을 보장하는게 아니라 요청자의 안전을 위한 안전거래인가요?'


'.....'


나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숨고는 매칭 플랫폼일 뿐이니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래대로 계약서를 쓰고 아니, 선입금을 만 원이라도 받고 시작했을 일인데 플랫폼내에서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안전거래'의 '안전'이라는 말에 속아버렸다.


'클라이언트가 '확정'을 누르지 않으면 한 푼도 입금이 되지 않는다'라.. 지금이야 몇 만원짜리 명함 디자인이였지만 만약 몇 십만원짜리, 몇 백만원짜리 일이였으면 어땠을까. 이거야 말로 클라이언트가 갑질을 하라고 대놓고 부추기는 방식의 안전거래 아닌가. 갑자기 안전거래를 진행중인 다른 계약들도 불안해졌다.


오프라인에서 업무가 진행되는 다른 일들은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온라인만으로 소통하고 작업부터 완성까지 이루어지는 디자인이나 번역에 있어서는 프리랜서( a.k.a 고수)는 절대적으로 을이 될 수 밖에 없다. 아, 내가 플랫폼에 무엇을 기대한걸까. 그래 프리랜서의 삶은 그저 자신이 자기를 지켜야만한다.


그렇게 나는 이 꺼림직한 명함 일로 요청자와 왈가왈부 하는 기회비용이 내가 원래 받아야할 돈 몇 만원을 초과한다고 느껴 그냥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숨고에게 중재를 할 수 없으면 숨고 캐쉬로라도 일정 부분을 환급해달라 요청하니 그것도 안된단다. 이 플랫폼에 유료결제를 진행해 클라이언트를 찾고 플랫폼 내에서 거래를 하고 금전적인 계약을 했는데 추후 문제는 외부기관으로 해결하라니...


플랫폼에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사용하고 내부 시스템에서 거래를 했는데 어떤 책임도 지지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요청자는 공짜로 견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냥 견적이 궁금해서 플랫폼에서 요청을 보내보는 사람들도 많다. 요청자들이 견적을 훑어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반대편의 '숨은 고수'들은 돈을 지불한다.


그렇게 훑어보기만 하고 답장도 없이 내 돈을 증발시킨 요청자들 사이에서 겨우 따낸 일을 플랫폼을 믿고 안전거래를 진행했다. 이렇게도 일방적인 안전거래라니.. 이 회사에는 디자이너도 없나?


대학생 시절에도 종종 누가 뭐 하나 만들어줘 뭐 하나 해줄 수 있어 ? 돈줄게 라는 말에 시안을 몇 가지 잡고 미팅을 하다가 그대로 흐지부지 되어버렸던 경험이 많다. 아마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뒤로는 절대로 계약서를 제대로 쓰고 선입금을 받기 전까지는 계약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게 프리랜서의 일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패였다.


계약서를 제대로 썼다 하더라도, 일하면서 추가된 업무들에 일일히 추가 계약서를 쓰는게 귀찮아서 안 썼다가 낭패를 본 적도 많았다. 요청한 스콥이 바뀌었는데 같은 금액에 해달라는 사람, 기한을 무제한 미루다가 막상 스케줄을 조정하고 일정을 미루니 지금 당장 필요하다며 길길히 날뛰는 사람... 그럴 때면 회사에 든든한 울타리가 얼마나 갖고 싶은지 모른다.


프리랜서를 위한 플랫폼은 없다. 프리랜서를 위한 '안전 거래'도 없다.


오늘도 프리랜서와 백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어나가며 단 돈 몇 만원에 왕창 스트레스를 받고 말았다. 내 안전은 내가 챙기는 수 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존중하기 어려운 사람과는 일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