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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11. 2020

비움으로써의 채움

비움의 미덕은 진정한 채움에서 온다.

간만에 주방을 정리하려고 팬트리를 열었다. 자칫 발을 잘못 들였다가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광경이였다. 비건을 시작하면서 구매하기 시작한 각종 영양 성분 제품, 비건베이킹에 필수인 견과류(해바라기씨부터 브라질넛트까지), 아침 스무디에 타 먹는 각종 슈퍼 푸드, 3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코코넛 오일에 각종 찻잎, 향신료, 오일...


올해 초 이사를 하면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건만, 어느새 나는 다시 맥시멀리스트가 되어있었다. 쓰지 않을 것들을 정리해서 당근마켓에 팔거나 무료로 나누려고 하나씩 재료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버릴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 매일 쓰는 물건들이였고(놀랍게도 나는 해바라기씨와 가람마샬라와 뉴트리셔널 이스트를 매일 쓰고 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구체적인 사용계획이 있는 것들이였다. 그렇게 나는 다시 미로의 문을 닫았다.


반의 반의 반을 꺼내보았다.


이번에는 화장실 청소로 옮겼다. 이제 막 화장실 배변에 성공하고 있는 새로운 임시보호 구조견 챔프의 오줌이 있었다. 샤워기를 잡고 화장실 전체에 물을 촤악 뿌리고 뭘 좀 정리하려고 보니 이번에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정리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선반에는 다 써가는 샴푸바와 얼굴 비누 하나, 그마저도 이제는 귀찮아서 샴푸바는 더 이상 구매하지 않고 좋아하는 비누 하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으려고 생각중이였다. 그리고 치약 하나, 칫솔 하나. 칫솔은 헤드 부분만 교체가 가능하고 아랫쪽은 반영구적으로 사용가능한 제품이다. Goodwellcompany라는 브랜드인데, 여하튼 이 칫솔계의 애플 같은 디자인으로 갈아타면서 화장실에 딱히 칫솔을 쟁여둘 이유도 없게 되었다.



비누 둘, 칫솔 하나, 치약 하나.


이번에는 화장품을 두는 선반으로 옮겨갔다. 스킨 하나, 크림 하나, 립스틱 네 개 끝. 원래도 얼굴에 뭘 바르고 화장하는걸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화장품에 관심이 없다보니 살 일이 없고 그러다보니 누가 주는 것 아니면 대용량 같은 걸로 연명하곤 한다. 평상시에는 사실 스킨 같은 것도 잘 바르지 않는데 최근에 비건 브랜드의 스킨을 누가 선물해줘서 쓰고 있다.


화장도 어지간해서는 하는 일이 없다. 쌩얼이 예쁘고 삶이 너무 바쁘고 그래서는 절대 아니고, 얼굴 자체가 좀 평평~하게 생긴게 화장을 하나 안하나 드라마틱한 체인지가 없고 진한 화장도 어울리지 않아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종종 SNS에서 화장만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화장이 재밌을지 너무 부럽다.


끝!


부엌에서는 엄청난 맥시멀리스트였던 내가 화장실에서는 또 대단한 미니멀리스트였다. 잠시 거실 쇼파에 앉아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간촐하다면 간촐하고 뭐가 많다면 많은 것 같은 집. 책은 잔뜩 있지만, 옷은 내 돈 주고 산 일이 잘 없고, 향수는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지만 향초는 가득하고, 냉장고 자석이나 장식품 같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식물과 동물이 많은 집.


돌이켜보면 처음 독립을 하고서는 이것저것 내 취향이 아닌 물건들을 사느라 돈을 많이 썼다. 핀터레스트에서 본 사진대로 침대 위를 꾸며본다고 풀베딩을 갖춰보기도 하고, 시리즈별로 모은 스타벅스 시티컵이 부러워서 여행갈 때 깨지지마라고 옷들 틈에 싸 꾸역꾸역 들고 와보기도 하고. 요새 유행한다는 하이라이터도 사보고, 핫하다는 물광크림도 사보고, 필수템이라는 에어쿠션도사 보고, 모든 남자들이 반한다는 섬유유연제도 사보고..


살다보니 나한테 필요없는게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런 것들을 하나둘씩 비워내고 사지 않고 지나치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남은 공간들을 내가 정말로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로 채워갔다. 어릴 때부터 후각이 예민해서 이상하게 향수 냄새만 맡으면 머리가 아팠던 나는 남들 다 갓 향수를 사던 20살 시절 향수를 한 통도 끝까지 써보지를 못했다. 대신 향초 태우는걸 즐겨왔고 공간에서 풍기는 향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그렇게 하나 둘씩 모아온 오일과 디퓨저, 향초들은 집안 곳곳에서 그 공간을 충분히 채우며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화장을 하지 않아 화장품에도 별 관심은 없지만 입술 바르는 것만은 좋아해서 립스틱만은 꼭 백화점에서 비싼걸 사는 소소한 사치를 한다. 에르메스, 톰포드, 10만원대에 가까운 립스틱들을 거침없이 산다. 왜? 이게 내가 화장대를 비움으로써 찾아낸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니까. 조그맣고 비싸 보이는 통에 곱게 들어져 있는 립스틱 꺼내 뚜껑을 열고 지문 하나 묻지 않은 립스틱을 입술에 살짝 바르는 그 순간을 나는 정말로 사랑한다.


나에게는 먹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세 번, 때로는 그 이상 하는 먹는 행위는 나를 누군지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조각이니까. 내가 먹는 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매 끼를 성심으로 차려먹고, 비건을 지향하고, 계속해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비건 레시피들을 개발하고 나눈다. 나에게 부엌은 도서관 같은 곳이다.


사실 미니멀리즘이라는 것, 어쩌면 모두의 개성을 없애려는 무인양품이나 유니클로의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색은 죄다 화이트 아니면 블랙, '오늘의 집' 어플에 올라오는 모두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집, 모두가 마시는 바로 그 커피 한 잔, 멋스러운 양산형 라이프 스타일.


미니멀리즘의 진짜 미덕은 비워낸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냐에 있다. 나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 내가 즐기는 것, 나의 오늘 하루를 조금 더 힘이 나게 해주고 웃음 지을 수 있게 하는 것들, 나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들로 그 비움을 채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미니멀리스트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최소한의 것은 유니클로 피케 티셔츠 한 장도 아니고, 하얀 침구도 아니고, 단 한 가지여도 좋으니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니까.


비움으로써의 채움, 오늘도 나는 내 공간을 조금 더 비우고 또 다른 무언가로 조금 더 채우고 있다.


(주로 개들로 채우고 있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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