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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Feb 15. 2020

앞으로는 명품만 사기로 결심했다

다른게 아니라 환경 때문에


엄마는 초등학교 방학이면 나를 도서관에 데려가 농담으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읽으면 십 만원 줄께! (당시 물가로도 최저임금도 나오지 않는..)라는 말을 했다. 나는 십 만원을 벌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었다. 물론 책장에 꽂힌 순대로 10권 정도 읽었을 때 그만두고 만화책을 섭렵하기 시작했지만, 내가 읽기를 시작한 그 책장이 하필이면 환경코너의 책이였고 그렇게 10권의 환경책을 어린 나이에 완독해버린 나는 환경운동가를 장래희망으로 삼으며 비누로 머리를 감고 종이컵을 쓰지 않는 환경꿈나무로 자랐다.


책이 주는 교육의 힘은 참으로 놀라워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남들은 유난스럽다(?)싶은 친환경적 지침들이 나에게는 훨씬 편한 행동들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에게 자연스럽게 깃들어버린 가치관에 한 가지 시련이 있다면 바로 패션이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최고의 미덕이다. 그리고 그 소비가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영역이 패션이다. '의'는 식이나 주와는 성격이 조금 달라서, 식과 주만큼 생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는 거울을 통해 보는 '나의 시선' 그리고 매일 마주치는 '남의 시선'과 결합하는, 자아를 만들어내는 특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높은 구두를 신고 화려한 원피스를 입을 때와 세련된 핏의 자켓과 팬츠를 세트로 입을 때의 마음가짐은 달라진다.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의'의 속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의 속성이 그러하다 보니 식과 주와 관련된 제품을 따질 때에는 안전성과 원료 같은 것을 기준으로 가치를 생각하게 되는 반면에, 의는 외적이거나 미적인 요소들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 옷 한 벌이 오기까지 거치는 과정들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옷에서 강조되는 것은 과정이나 재료보다는 마지막에 완성된 모습이다.


종종 드는 생각이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영역보다 패션의 환경문제에 가장 둔감하다. 가죽이나 퍼처럼 직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해'가 보이지 않으면 그런 문제들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가 받는 환경 교육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주로 비닐과 플라스틱, 물, 대기오염,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이였고 그런 것들은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매끈한 옷과는 잘 연관지어지지 않는다.


한 벌의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옷 이전에 원단을 만드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원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섬유가 필요하다. 목화나 누에고치처럼 자연에서 바로 섬유를 뽑아낼 수 있는 재질도 있지만 패션계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원단은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섬유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화학섬유보다는 면같은 섬유가 훨씬 sustainable하냐? (친환경 원단, 친환경 공정이란 표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다. 패션계의 어떤 과정도 친-환경일 수는 없다. 다만 지속가능한 방식을 찾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하는데에 들어가는 물과 비료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특별한 케어없이 저절로 자라는 나무의 셀룰로오스를 원료로 하는 '재생 섬유'들은 어떨까? 가장 흔한 재생섬유가 바로 레이온(비스코스)이다. 자연에서 바로 섬유를 얻어내진 않았지만, 자연에서 얻은 원료를 가공해 섬유를 얻어낸다니, 일단 합성 섬유보다는 좋아 보인다. 레이온의 단점을 보완하며 등장한 모달이나 대나무에서 원료를 얻어낸 뱀부같은 소재(어쨌든 둘 다 레이온이다)는 친환경 전략을 적극적으로 쓰는 원단이기도 하다. 대나무, 너도밤나무 원단이라 듣기만 해도 푸릇푸릇한 숲이 가득한 곳에서 만들어진 것 처럼 광고 된다.


재생섬유 레이온


아이러니하게도 레이온은 가장 대표적인 비-친환경 원단이다. 셀룰로오스를 섬유로 만들어내기까지 아주 무거운 화학공정이 필요하며 엄청난 대기오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레이온 제조업체는 미국이나 유럽국가 같은 선진국에는 거의 없는데, 환경 규제를 맞추기가 어려워서다. 레이온 제조과정은 노동자들에게도 치명적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원단이 과연 우리 몸에도 아주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같은 모달이라도 렌징사같은 제조사는 sustainable한 공정을 염두에 두고 섬유를 제작한다. 이런 브랜드의 섬유로 만들었다면 sustainablity가 다를 수 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렌징사 모달과 중국산 모달을 얼마나 섞었는지 알 수 없다. 렌징사만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sustainable 레이온인 라이오셀 -텐셀이라 흔히 불리는 - 도 있지만, 라이오셀은 렌징사의 섬유 타입에 따라 포르말린이 검출되기도 한다. 이처럼 섬유 회사 따로 원단 회사 따로 돌아가기 때문에 최종 소비자는 일일히 정보를 확인하기 어렵다.)



https://ecocult.com/greenwashing-alert-that-natural-fabric-made-from-plants-might-be-toxic/



생리대 파동을 떠올려보자. 순면 100%라는 문구와 몽글몽글한 목화 그림을 넣은 패키지는 자연에서 행복한 노동자가 목화를 따서 그 목화를 바로 생리대에 넣어 만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우리한테 오는 대부분의 제품들은 아주 많은 공정을 거쳐서 오기 때문에 원료가 무엇인지 보다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순면 100%를 쓰더라도 그 뒤에 가공에 쓰인 화학물질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원단을 쓰는 제품일수록 그러한데, 원단이 만들어지고, 그 원단으로 최종상품을 만들기까지 거치는 과정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섬유제조 - 원단제조 - 원단 염색, 가공 - 디자인 - 봉제 등)



목화가 연상되는 고운 생리대 브랜딩


'친환경'을 컨셉으로 사용하여 소비자를 우롱하는 행동을 GreenWash라고 부른다. 이런 GreenWash가 정말로 위험한 점은 소비자들은 자신이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만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디자이너가 원단을 고르고 살 때, 같은 섬유 종류라 하더라도 어떤 회사의 섬유가 몇 퍼센트 인지는 알기 어려울 뿐더라 어떤 공정으로 섬유가 제조되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런 것까지 고려하며 옷을 만들기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크다.


섬유 회사는 섬유만 만들고, 원단 회사는 원단만 만들고, 디자이너는 옷만 만들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정보의 투명성이 떨어지는 업계가 바로 패션산업이다. 바꿔말하면 사실상 sustainable과는 거리가 아주 먼 제품을 만들고도 친환경 전략을 사용하기 쉽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알아가며 대체 어떤 소비가 가장 현명한지 수없이 고민하게 되었다. 재질과 원단에 대해 이해하면 상품을 골라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애초에 우리는 원단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옷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공정들을 일일히 확인할 수 없다. 원단 제조 과정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하더라도 봉제 과정에서 있을 제 3세계의 노동착취 문제나, 염색과 후가공에서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많은 공정들 사이에서 모든 것이 바람직하긴 어렵고 그 중 뭐가 더 나은지 가치판단하기가 불가능하다.


솔직히 말하면, 차라리 퍼를 입는게 '환경적으로는' 가장 friendly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었다. 그런 제품은 동물을 죽이지만 생물이라는 특성상 가공방식이나 봉제방식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막대한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을 일으키는 대규모 화학 공정을 거치지 않는다. 또, 그만큼 비싼 가격에 팔리기 때문에 패스트 패션과 비교하면 훨씬 소량 생산된다. 과연 여우 목도리 한 켤레를 만드는 일이 20pc 뱀부 팬티 세트보다 동물을 덜 죽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우리가 퍼(털이 전면에 보임)보다 오리털침구(털이 가려져 있음)에 훨씬 관대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인간이 얼마나 보이는 것만을 직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 애초에 100% eco-friendly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패션계는 그야말로 최선의 차선조차도 실행하기가 어려운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기로 했냐?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질 지 모르지만 나는 앞으로 명품만 사기로 결심했다.


옷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명품'이라 말했을 때 샤넬, 에르메스, 디올같은 초특급 하이엔드 브랜드만 떠올릴지 모르겠다. 물론 그 외에도 '명품'이라는 단어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들은 아니지만 보테가, 셀린, 로에베, 마르지엘라 등..  수없이 많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존재한다.


간이 작아 한 번에 십 만원 이상은 옷에 잘 못 쓰는 내 기준으로는 옷 한 벌에 백만원에 근접하거나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명품이다. 물론 가격을 기준으로 명품이고 아니고를 따질 수는 없겠지만, 내가 말하는 명품은 '비싸다' 보다는 '확실한 컨셉과 스타일 아래 그 브랜드를 지휘하는 디렉터와 디자이너가 매 시즌 라인을 출시하는 브랜드'에 더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이런 제품들은 보통 고가에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쇼핑에 백 만원 이상 쓰는 일을 항상 그림의 떡처럼 생각했다. 어쩌다 세일에 세일에 세일가로 직구를 하거나 외국의 아울렛을 방문해서 사 본 경험뿐인 내가 명품만 사겠단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는 오래 입을 수 있어서다.


Sustainability와 Eco-Friendly를 실천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물건을 오래 쓰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옷을 유행에 뒤쳐졌다거나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입지 않는다. 그렇게 이 옷도 버리고 저 옷도 버리고 하며 옷장 정리를 할 때 오래 살아남는 옷들을 가만보면 비싼 돈을 주고 산 옷일 때가 많다. 특히 두꺼운 겨울 옷들일수록 그렇다고 느끼는데 내 옷장에서 가장 오래된 생존자는 모두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이였다. 스톤 아일랜드 패딩을 10년 째, 띠어리에서 산 코트를 6년 째.. 그 때 당시에는 사치라는 소리를 들으며 산 옷이지만, 그 기간동안 날 스쳐지나간 겨울옷들을 생각하면 이게 낫지 싶다.


또 비싸게 산 옷은 관리를 잘하게 되서 오래 입게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비싼 물건은 막 쓰지 않게 된다. 아마 질이 좋아서도 있겠지만 심리적으로 더 조심스럽게 사용하기 때문에 오래쓰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망가지더라도 쉽게 버리지 않고 수선을 해서 입게 된다. 지난번에 큰 맘 먹고 산 부츠를 수선하러 압구정에 있는 명품 전문 수선집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어떤 분이 조선시대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듯한 고야드 캐리어를 가져와 수선을 맡기시는게 아닌가.


그렇다, 돈에 최대 가치가 부여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싼 물건을 산다는 것은 그 안에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물건을 우리는 쉽게 버리지 못한다.


두 번째로는 명품이야말로 '제대로' 만들어졌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도 당연한 얘기인데, 지하철에서 산 루이비통 모조품 가방과 에르메스 가방 중에 어떤 과정에서 불합리한 노동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대량생산되는 제품과 소규모로 생산되는 제품 중 어떤 제품이 상대적으로 원단이나 공정과정을 엄격하게 거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어쩌면 옷이라는 거, 원래 이렇게 싸면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비건이나 채식지향의 삶이 모두가 해야한다거나 강요할만한 가치관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먹는 고기라는게 너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의 고기를 얻기까지 일어나는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고기는 한 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이 되어야 맞지 않나 싶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게 자연스러운 섭리라지만, 자연상태에서 우리가 그렇게 자주 사냥에 성공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다시 옷 얘기로 돌아와보자.


대규모 자본을 가지고 있는 명품 브랜드들은 sustainable한 방식을 시도하기도 훨씬 쉽다. 최근 프라다에서는 버려진 어망으로 만든 upcycle 소재로 제품을 제작하여 화제가 되었다. 보통 upcycle 원단과 같이 sustainability가 있는 소재들은 단가가 비싸다. 프라다가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건을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션업계의 sustainability가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주제인만큼 많은 브랜드들이 시도하고자 하지만 그 진입장벽이 낮지만은 않다. 자본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만이 이러한 시도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https://robbreport.com/style/fashion/pradas-sustainable-re-nylon-bags-are-made-from-recycled-ocean-waste-2856553/



마지막으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명품 옷이 예쁘기 때문이다. 비싼 건 좋다. 비싼 건 예쁘다. '의'의 순기능은 나를 표현하는 일이다. 그 표현력에 해상도가 있다면 아마도 명품이 가장 높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옷을 사지 않는 방법이겠다. 그렇지만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환경을 지킨다는 것은 강요할 수 있는 선택지도 아닐뿐더러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나답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패션을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쇼핑이 바람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과정이 자신의 인생의 또 다른 가치와 상충할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보가 투명했으면 혹은 선택지가 많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 모두 마음 속 깊은 구석에는 다같이 행복하고 지구에 폐를 안 끼치고 싶다는 가치관 하나쯤은 있잖아요!?)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중고로 옷을 사고 파는 일이다. 자신이 사고싶은 제품이 정확하게 정해졌을 때는 나는 중고를 사는 것을 무조건 추천한다. 지구상의 옷은 항상 포화상태이고 중고로도 여전히 몇 십년은 더 입을 수 있는 제품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중고거래에 있어서도 명품이 훨씬 유리하다. 명품 제품들은 닳고 낡아도 또 금새 누군가에게 팔리고 또 새로운 주인과 한참을 보내다 다른 주인 찾기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쇼핑의 즐거움도 만끽하면서도 최선의 차선의 방법을 찾고 있다면 나는 명품을 사는 것을 추천한다. 내 손에 하나의 물건이 오기까지 거쳐지는 과정과 인력에 큰 돈을 지불하는 것, 그리고 큰 돈을 지불한 만큼 그 제품을 의미있게 생각하고 오래쓰는 것, 마지막으로는 스타일적으로도 품질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구매를 하는 것,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패션을 소비하는 방식 중 하나의 차선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여기까지 백만원어치 쇼핑을 발렌타인 기념으로 스스로에게 선물한 나를 위한 변명이였다.





패션계의 Sustainability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하는 몇 가지 사이트.


https://goodonyou.eco/

https://newclassics.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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