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에게 약이란.
우울증의 내리막길을 4개월가량 굴러 떨어졌다. 오르락내리락 매번 겪는 일이건만, 10년째 데구르르 아래로 떨어질 때면 너무 고통스러워 도무지 삶이라는 것을 참기가 어려워진다.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기 어렵다. 머리를 감는 것조차 너무 복잡한 태스크로 느껴진다. 정말 죽어야 하나? 이렇게까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면 이건 죽으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왜 이렇게 되고 있는지 아주 잘 안다. 바로 병원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악순환. 너무 우울해서 병원에 갈 힘이 없다. 병원에 가지 않고 약을 먹지 않는다. 더 우울해진다. 죽고 싶다. 죽고 싶으니 굳이 나를 낫게 해 줄 생각이 들지 않아 또 병원에 가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구렁텅이로 계속해서 떨어진다.
그렇게 죽기 직전,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또 살아버렸다. 제 발로 병원에 기어간 것이다. 역시 나는 이번 생에 죽기는 글렀다. 3개월 만에 나를 만난 교수님은 화부터 내셨다.
"ㅇㅇ씨 이거 진짜 위험한 짓입니다. 이렇게 하면 진짜 죽어요. 진짜 죽고 싶어요?"
"...(네)... 아니오"
" 다시 약 먹는 것부터 하나씩 시작합시다."
렉사프로정, 아빌리파이정, 쿠에타핀정, 환인클로나제팜정, 독세정, 라믹탈정.. 어쩌고 저쩌고.. 또 약을 잔뜩 받아왔다. 아이고 먹기 싫어라, 아이고 살기 싫어라. 그런데도 시키는 데로 꼬박꼬박 잘 먹었다. 사실 살고 싶나 보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제길 또 인생이 살만해져 버렸다.
갑자기 활기가 찬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침대 정리부터 한다. 몇 주 전 침대와 하나가 되어 하루 종일 울며 머리를 쥐어뜯던 내가 혼자 아침을 차려 먹고 샤워도 한다. 맨날 비누로 대충 감던 머리가 불쌍해서 좋은 향이 나는 샴푸도 하나 사보았다. 약 몇 알에 내 기분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다니, 정말 황당하다.
덩달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쉬워진다. 병든 닭처럼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 옆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정신 차리고 약속도 나가고 활짝 웃는 나를 보며 비로소 사람들도 편안하게 내 옆에서의 시간을 즐긴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내가 약을 안 먹은 탓이다 전부 다.
어떤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걸 받아들이는 법을 아직도 나는 잘 모르는가 보다. 나는 우울증 환자다. 나는 경계선 인격 장애 환자다. 이것은 (최소 당분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 달 가까이 약을 차곡차곡 챙겨 먹은 오늘, 우울증에 바닥을 찍고 내동댕이 쳐버린, 한 때 열심히 운영하던 가게에 혼자 다녀왔다. 가게를 조금 정리하다가 실수로 코코아 파우더를 쏟았다. 이런, 예전 같으면 그대로 뒤도 안 보고 한강으로 달려가 죽네 사네 했을 텐데, 이 정도쯤이야 하며 열심히 치웠다. 치우기 시작한 김에 선반 안까지 쓱쓱 정리하고 집에 와서도 기세를 몰아 부엌 정리를 싹 하고 거실 구조까지 바꾸었다. 그러고는 이제 앉아서 글까지 쓴다.
렉사프로정. 대체 너는 뭐냐,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약을 먹고 있는 나의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가, 약을 먹지 않은 나의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이 좋다. 예전 같으면 죽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겠지. 오늘도 나는 약을 삼킨다. 약을 먹는 삶도 나쁘지만은 않다. 비록 평생 먹어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