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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Sep 24. 2021

콜롬비아에 왔으니 커피 한잔해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1.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카페에 가면 스무디나 티를 시켜 먹곤 했다. 그런데 커피의 본고장 콜롬비아까지 와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 건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일 터.
중앙 광장 옆,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샛노란 페인트가 칠해진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두터운 우유 거품이 커피의 씁쓸한 맛을 줄여줄 거란 생각에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켰다. 가게에 손님이 없어 텅 비어있던 탓에 단 몇 분 만에 등장한 커피.


이 모습 그대로가 당연한 것처럼 미리 의견을 묻지 않고 두텁게 뿌려놓은 시나몬 토핑과 그 옆에 살며시 올려진 버터 쿠키 하나. 쿠키를 배어 물고 이어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와. 이게 바로 커피구나. 한국에서 두어 번 마셔봤던 커피라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니면 핫초코에 가까운 달콤한 모카뿐이었던 내 머리에서 딩동댕- 실로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우고 추가 주문을 했다. 처음 마신 것과 맛도 생김새도 똑 닮은 커피가 금방 준비되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이 카페에 들러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언제 가도 손님이라곤 늘 나뿐이라 묘했던 나만의 작은 공간.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 같았달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그 공간이 정확하게 그려진다. 이제 나는 어느 카페를 가도 항상 카푸치노를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맛을 내는 곳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운 그날의 카푸치노.



2.

이렇게나 아름다운 작은 호숫가 마을에서 머리끝까지 화가 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러한 혼자만의 생각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동네 주민들은 언제나 여유가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집 앞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할머님들께 집을 정말 예쁘게 가꾸셨다고 칭찬을 건네자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신다.


어느 때처럼 카페에 들렀다가 중앙광장을 지나쳐 가는 길, 오랜만에 광장 근처에 사람이 많이 보였다. 오늘은 드디어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겠다 싶었다. 근처를 둘러보다 한 아주머니께 넌지시 말을 걸었다. ‘혹시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을까?’


좋다는 대답을 듣고 계단 근처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주머니의 남편이 내 옆에 자연스레 앉으셨다. 근데, 그걸 보더니 주변의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씩 내 옆에 따라 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났다.

덕분에 원래 찍으려던 독사진보다 훨씬 소중한, 그날 그 순간 그대로를 담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3.

이 알록달록한 집들이 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한 번 마을 끝에서 끝까지 걸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을이 얼마나 클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이른 아침에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어떻게 모든 집들의 페인트가 어제 갓 칠해진 것처럼 쨍하고 깔끔할 수가 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러한 내 궁금증은 금방 해결될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페인트를 덧칠하고 있는 동네 주민 여럿을 자연스레 마주쳤다. 그냥 자신의 공간을 부지런히 관리하는 것뿐이었다. 귀찮은 일을 하는 듯한 모습이 아닌 애정으로 가득 찬 표정. 묻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문득 며칠 전 자신의 집 앞에서도 사진 찍고 가라고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분도 열심히 가꿔 놓은 집이 무척 자랑스러웠나 보다.


중앙광장을 벗어나 한 시간이 넘도록 걸었는데도 여전히 모든 집들은 화려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심지어 동네 놀이터조차 색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알록달록’이란 단어가 실재한다면 바로 이 마을의 모습일 테다.



4.

이곳 과타페는 여행 계획을 말해주면 주변의 열에 아홉이 말리던 그놈의 ‘위험한’ 콜롬비아가 맞나 싶던 마을이었다. 실제로 늘 조금은 긴장해야 했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여기서만큼은 정말 한국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밤늦게 혼자 호숫가에 앉아있기, 핸드폰 손에 쥐고 다니기, 벤치에 누워 눈 감고 햇볕 쬐기 등. 뭘 해도 안심이 되었다.
과타페에 도착한 첫 날밤 혼자 침대에 누워 떠올렸던 생각, ‘이곳은 분명 콜롬비아에서 제일 사랑했던 도시로 남을 거다’는 결국 사실이 되었다. 이곳에서 했던 거라곤 산책과 사색뿐이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지 않은가 싶다. ‘무언가를 해서, 그래서 좋았다’가 아닌 마을 자체로서 마음 깊이 남았기에 더욱 소중하다.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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