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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Sep 30. 2021

카리브해 한복판에서 수영은 못하고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수영을 못한다. 심한 물 공포증이 있어 바닷가에 가거든 발을 담가 보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한 내게 콜롬비아에서 단 돈 십만 원이면 다녀올 수 있는 카리브해 한복판에 위치한 섬의 존재는 너무도 강렬했다. 매일같이 구글에 사진을 검색해 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했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면 굳이 갈 필요가 있을지, 또 초호화 리조트와 비싼 브랜드 샵들이 즐비한 ‘휴양지’에서 나 홀로 괜찮을지.


두려운 마음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와 핑계를 계속 만들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보고 싶단 생각이 도무지 사라지지가 않았다.

고민은 꼬박 한 달간 이어졌다. 이쯤 되면 매일 검색창을 뒤적이던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가야만 했다. 그래. 안 해보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후회하자. 눈 딱 감고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드디어 검색 지옥에서 해방이다.


가자, 카리브해로!



남미에 온 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날이다. 여행이 길어지면 자연스레 ‘여행 중’이란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데 다시금 마음이 설레는 순간이 찾아왔다. 비행시간은 한 시간여. 작은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비행기는 낮은 고도로 날았고 덕분에 너무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적정한 거리에서 카리브해를 두 눈 가득 담았다.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니 신혼여행인지 아니면 직장 생활 속 달콤한 휴가인지, 잔뜩 상기된 표정이다. 눈에 띄는 그들의 형형색색의 꽃무늬 원피스와 짙은 화장 그리고 분홍색 캐리어.

괜스레 나의 먼지가 잔뜩 낀 낡은 샌들과 몸집만 한 배낭이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를 제외하고는 배낭여행자가 아니 심지어 혼자인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호스텔에 도착하면 그곳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겠지?' 희망의 끈을 붙잡은 채 호스텔로 향했다.


입국 수속을 기다리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8인실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 없고 각종 짐들만이 텅 빈 방을 채우고 있었다. 조금은 쓸쓸해진 마음으로 가방 정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고 반가움에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저 두고 간 물건 하나를 빠르게 챙겨 다시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많이 바빴나 봐. 아니, 그냥 내가 작게 말해서 못 들었을 뿐일 거야. 괜찮아 애초에 혼자 떠나온 여행인걸. 괜찮아….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울적해졌다. 대단한 음식을 요리할 기분이 나지 않아 샌드위치 하나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한숨이 나왔다. 처음부터 같이 온 일행일지 여기서 만나 친해진 거일지 모를 방안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어갈만한 틈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구태여 그럴 기운도 없었다.


어쩐지 지금까지 모든 게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불안한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오고 한 번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끊임없이 깊게, 더 깊게 우울해진다. 딱 그 꼴이었다. 역시 휴양지는 오기 싫었다는 둥 이 호스텔을 예약하는 게 아니었다는 둥 지난 모든 것들을 곱씹으며 후회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직도 생생한 바로 그 순간. 방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 이리스.

이층 침대에 혼자 누워있는 나를 보더니 손을 크게 흔들며 인사해 주었다. 저녁 8시. 드디어 오늘 하루 중 처음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내내 미소를 띤 채로 내게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어디서 왔는지, 언제까지 머무는지, 지내는 동안 특별한 계획이 있는지….

그녀는 페루비안이며 휴가차 놀러 왔다고 한다. 그것도 바로 어제, 그리고 혼자서 말이다. 이리스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의 존재가 정말 반가웠나 보다.

‘제니, 너 특별한 계획 없으면 나랑 같이 놀자!’


사람의 기분은 참 쉽다. 오늘 하루 만에도 저 혼자 몇 번을 오락가락하는지. 지하에서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63층 꼭대기까지 오른 내 기분. 걱정으로 가득 찼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함께 조식을 먹고 호스텔을 나섰다. 그런데 호스텔 입구 언저리에서 이리스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 상대는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길 건너편에서 두 명의 친구가 다가오고 있었다. 페루에서 온 루이스와 콜롬비아에서 온 마누엘. 다들 혼자 떠나온 여행자들이며 서로를 바닷가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바다에서 알게 된 사이라는 말이 정말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우리들은 그냥 바다가 아닌 바로 카리브해 한복판이다.

뜨거운 햇살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백사장, 경쾌한 파도 소리, 투명한 빛을 뽐내는 바다, 그리고 국적이 모두 다른 우리들.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수영도 못하는데 자세히 알아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계획이 없던 덕에 친구들의 일정을 부담 없이 따를 수 있었다. 우리가 있는 본 섬 외에도 근처에 자그마한 섬들이 여럿 더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다 함께 보트 투어를 예약하러 갔고 평소처럼 부족한 스페인어로 어렵게 흥정할 일 없이 원어민 친구 셋이 모든 걸 도와주었다.


연속된 행복보다는 불행 뒤에 다가오는 행복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바로 어제만 해도 남은 일주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새로운 친구 넷과 함께라니. 너무도 든든하고 고마워서 이리스를 꼬옥 안아주었다.

역시 오길 잘했다. 나의 선택이 성공일지 실수일지는 결국 그 선택을 한 후에야 알 수 있다. 성공이면 좋고 아니어도 남는 교훈이 있을 테니 결과가 두려워 선택을 미뤄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아야지.



아 참. 어제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친구들은 일행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짐을 싸더니 다 같이 떠났다. 이제 방안에 남은 것은 이리스와 나뿐. 저녁에 돌아오면 어떤 친구들이 새롭게 도착해있을지 온 마음 가득히 기대가 차올랐다.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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