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좋아한다. 대학생 때, 잡생각이 끊이지 않는 우울한 날엔 집 앞에서 471번 버스를 타곤 했다. 강북의 끝자락 은평구에서 종로와 서울역을 지나 강남역과 서초구를 관통해 다시 은평구로 돌아오는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노선이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서울 여행 코스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자리는 기사님 건너편의 첫 번째 의자. 앉으면 커다란 버스 앞유리를 방해 없이 독차지할 수 있는 나만의 VIP석이다. 이어폰을 끼고 두 시간여를 돌고 오면 신기하게도 언제나 기분이 다시 좋아져 있었다.
이런 내게 기본 열 시간이 넘는 탑승 시간을 자랑하는 남미의 장거리 버스는 설레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노래들로 꽉 채워진 플레이 리스트와 일기장, 그리고 과자 두어 개면 몇 시간짜리 여정이든 두렵지 않았다.
드디어 처음으로 남미 장거리 버스를 타보는 날. 총 10시간 반이 걸린다는 매표원의 말에 싱글벙글 웃으며 버스에 올랐다. 옆자리엔 누가 앉을까,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면 친구가 되어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편하게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조금은 아쉽게도 옆자리는 내내 비어 있었다. 일기를 몇 개 쓰고 챙겨온 쿠키도 다 먹고 나니 조금씩 잠이 오기 시작했다. 버스가 밤 열 시쯤 출발했으니 대충 아침 여덟시는 넘어야 도착하겠단 생각에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버스 전체에 불이 확 켜지며 밝아졌다. 승무원이 ‘산힐!’을 외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가는 도시가 버스의 종착점이 아니라 경유지일 뿐이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Me bajo!!! (저 내려요!)’
허둥지둥 짐을 챙겨서 내려보니 정식 버스 터미널이 아닌 어딘지 모를 길 한복판이었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나 포함 단 세명. 그 둘은 커플이었고, 이 길이 익숙하다는 듯 나를 뒤로 한 채 걷기 시작했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저기요! 소리 질러 그들을 불렀다.
‘나는 여행자고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센트럴에 위치한 호스텔에 가야 해. 가는 길이 비슷하다면 같이 가지 않을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괜스레 등 뒤 커다란 배낭도 슬쩍 보여주었다. 그들의 대답을 듣기까지 1초의 찰나 동안 마음속으로 ‘제발제발제발…’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좋다는 말이 들려왔다. 야호!
그들은 산힐에 사는 현지인 부부였다. 친척 집 방문 후 돌아오는 길이었고 자신들의 집은 센트럴을 지나서 있으니 가는 길에 나를 내려주겠다고 했다. 현지인 다운 능숙한 면모로 순식간에 택시 한 대를 잡았고, 안전하게 호스텔 코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께 택시비가 얼마냐고 묻자 어차피 집 가는 길에 잠깐 멈춘 것뿐이니 네가 낼 돈은 없다며 한사코 돈 받기를 거절하셨다. 한참의 실랑이 후 결국 돈내기를 포기하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름조차 여쭤볼 여유 없이 몽롱하던 새벽 시간에 만난 천사 같던 분들. 늘 건강하시길.
호스텔 문 앞에 도착해서 시계를 다시 확인하니 한숨이절로 나왔다. 한밤중에 호스텔 문을 두드려야 하는 일이 두 도시 연속으로 일어나다니! 게다가 이번엔 더 늦은 시간이다. 새벽 4시… 떨리는 손으로 문 옆 벨을 서너 번 연속으로 울리자 직원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왔다.
그는 지금은 시간이 너무 일러 방을 주기는 어렵고 일단 로비 근처 소파에서 눈 좀 붙이고, 아침이 밝으면 정식 체크인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단잠을 깨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내게 스태프 룸에서 두터운 담요 하나를 덮으라며 꺼내다 주었다. 아, 콜롬비아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이리 천사 같은 걸까. 이제 막 도착했지만 벌써부터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