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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Sep 15. 2021

콜롬비아에서 가장 사랑했던 도시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이란 수식어가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 몸소 느낀 메데진에서의 하루. 

남들의 극찬을 들으며 당연히 나도 좋아하리라 믿었던, 그래서 아무 의심 없이 호스텔에 6박씩이나 선결제를 해버린 나. 돈이 아까운 마음에 이동을 망설일 것이 없었다. 영 정이 붙지 않는 곳에서 단 일분조차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남들의 후기만 보고 냅다 호스텔부터 예약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구글맵으로 주변의 도시들을 살펴봤다. 그러다 발견한 ‘엘 뻬뇰’의 사진. 낯이 익었다. 분명 윈도우 바탕화면에서 본 적이 있을 법한 자태였다. 가자, 내일 아침엔 저곳에서 눈을 뜨자.


이 도시가 어지간히도 싫었나 보다. 떠난다는 기쁨에 아침 여섯시에 가뿐히 눈을 떠 엘 뻬뇰로 향하는 첫 차에 올랐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멀찍이 보이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난 이틀간 느끼지 못했던 기쁨이다. 그래, 이게 여행이지! 잔뜩 신이 나 주변의 툭툭이 호객꾼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엘 뻬뇰 앞까지 냅다 달려갔다.


총 740개의 계단을 올라야 바위 꼭대기 전망대에 다다를 수 있다. 정말 신이 나있던 나는 그 모든 계단을 몇 분 만에 훌쩍 올랐다. 그런데 분명 아래에 있을 땐 맑았는데 높은 곳에 올라와 날씨가 달라진 걸까 전망대에 도착하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쉬움에 한숨이 푹 나왔을 텐데 오늘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계속 웃음이 났다. 

내리는 비에 찰랑이는 호수가 예뻤고 덕분에 사람이 많이 없어 고요한 전망대에서 풍경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비가 오니 사진 속에 담기는 모습보다 두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더 아름다워 자연스레 카메라를 내려놓게 되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서있었다. 그래, 비가 와도 이렇게나 예쁜데 아쉬워하지 말자.



다시 바위 아래로 내려와 가장 가까운 마을이자 숙박을 할 과타페로 향했다. 단 돈 삼천 원만 내면 툭툭이를타고 십 분 만에 다다를 수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걷는 것을 택했다. 


여행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바라고 꿈꾸던 랜드마크 자체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에서 생기는 뜻밖의 인연, 뜻밖의 상황 그리고 뜻밖의 풍경들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믿는다. 차 위에 올라 빠르게 지나치느라 보지 못했던 모든 것들은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몇 개의 언덕과 야자수 숲을 지나 어느새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내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이렇게까지 알록달록한 마을은 난생처음이었다. 모든 건물이 파스텔 톤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창문과 창틀까지 꼼꼼하게 말이다. 게다가 벽과 창문과 창틀은 각각 다른 색이었는데 과하다는 느낌 없이 그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진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거짓말 같은 공간이 실존한다니 눈앞에 두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좋았어, 여기다. 오늘도 내일도 여기서 눈을 떠야지.



호스텔을 미리 예약하지 않고 왔지만 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6인실 안에 머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타페는 보통 엘 뻬뇰을 보러 왔다가 당일치기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꽤 많던 관광객들이 해 질 녘이 되자 모두 빠져나가 마을 전체를 독차지한 기분이었다.


한적해진 동네에 남아 혼자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앗, 혹시 내가 본인 집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불쾌한 건가? 괜한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막상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말은 걱정하던 것의 정 반대였다. ‘우리 집 앞에서도 사진 찍고 가!’

빈말이 아니었다. 그분은 정말 나를 자기 집 앞으로 안내하더니 사진을 잔뜩 찍어 주셨다. 게다가 여기 서봐, 저기 서봐 하며 곳곳에서 예쁜 사진들을 남겨 주셨다. 혼자 타이머를 맞춰 두고 후다닥 뛰어가서 사진을 찍던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사진만 찍어준 후 홀연히 사라지셨다. 내일 이 집 근처를 지나가다 마주치게 되면 꼭 크게 인사드려야지.


찍고 가라고 제안할만한 예쁜 집이었다


낮에 뜨거운 햇살 아래 반짝이는 호수도 좋았지만 늦은 밤 맥주 한 캔과 함께하는 호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하룻밤 만에 확신이 들었다. 이곳은 분명 콜롬비아에서 제일 사랑했던 도시로 남을 거라고.



엘 뻬뇰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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