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내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인 메데진에 도착하는 날. 숙소를 2박이나 3박 정도로 짧게 예약해 놓고 막상 도착해서는 항상 그의 배로 연장해버리는 나의 지난 행보를 떠올리며 이번엔 처음부터 넉넉하게 6일 어치를 예약했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하는 도시이니 당연히 나도 그렇게 느끼리라 믿었다.
야간버스로 열두 시간만에도착한 메데진. 이 도시는 또 얼마나 사랑하게 될까, 설레는 맘에 호스텔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서둘러 센트럴로 향했다. 그런데 워낙 오지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깔끔하게 정돈된 도시적인 길거리와 가게들이 어색하기만 했다.
삼천 원 정도면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던 Menú del día (오늘의 메뉴)만 먹어오다가 자칭 ‘브런치 플레이스’라고 적혀있는 곳들을 마주하니 내가 지금 남미에 있는 게 맞나, 어제 야간버스를 타고 도시 몇 개를 지나온 게 아니라 대륙을 건너 뛰었나 싶었다. 심지어 가격도 이만 원대! 그래도 오래간만에 기분 한번 내보자며 햇볕이 내려앉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화려한 플레이팅이 눈을 사로잡았다. 정갈하게 썰린 치아바타 두 개와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 자그마한 볼에 따로 담겨 나온 잼, 그리고 따듯한 카푸치노 한 잔이 준비되었다. 점원은 지나치게 친절했고 식사 후 디저트를 주문하겠냐고 묻기도 했다. 분명 비싼 만큼 맛있었고 새파란 페인트가 곱게 칠해진 테라스에 앉아 있었지만 영 기쁘지가 않았다. 이 곳엔 내가 생각하고 바라던 남미의 느낌이 없었다. 곳곳이 울퉁불퉁하게 짓눌린 빵과 조금은 짠 치킨 수프가 그리워졌다.
밥을 먹고 나와 골목골목을 돌아보는데 여기가 청담동인지 가로수길인지 아니면 메데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번화해 있었다.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가게 한곳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다 빌딩 사이 작은 공원을 발견했다. 사람이 좀 많은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일요일이라 그런지 플리마켓이 열려있었다. 야호! 드디어 구경할 만한 거리가 생겼다.
플리마켓에 도착함과 동시에 방금 막 비싼 점심을 먹고 온 것을 후회했다. 야속하게도 부른 배에 다양한 길거리 음식들이 그릴 위에서 맛있게 구어지는 냄새를 애써 모른 채 했다. 아쉬운 대로 즉석에서 갈아주는 생과일주스 하나를 들고 잔디밭에 앉았다. 이 도시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이었다. 자연스레 남은 5박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 도시가 나는 왜 이토록 불편하기만 한 걸까.
여느 남미 도시들이 그렇듯 메데진 역시 빈부격차가 심하다. 지금 내가 머무는 호스텔 근처는 부촌에 속해 안전한 지역이었는데 보통 서민들이나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은 높다란 언덕 위 고지대에 거주한다. 그 사람들이 언덕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정부에서 시내 한복판부터 고지대 꼭대기까지 오가는 곤돌라를 만들어 대중교통수단의 일종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곳에 가보자 싶었다. 가서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자연스레 이 도시에 정이 붙겠지.
곤돌라에 올라 고지대를 향해 가는 길, 발아래로 작은 집들이 빽빽하게 붙어있었다. 언덕의 초반은 빨간 벽돌집들이었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차마 지붕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얇은 판자로 덮여진 집들이 나타났다. 분지 지형이라 그럴까, 보통 높은 곳에 부촌이 위치한 한국과는 정 반대였다.
종착역에 도착해 내리자 관광객이 흔치 않은 동네라 그런지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호기심이 한가득이다. 이미 콜롬비아만 2주째. 그들이 나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란 걸 잘 알기에 먼저 ‘올라!(안녕)’ 하며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 그렇듯 밝은 미소로 답해준다.
운이 좋게도 긴 시간 헤맬 것 없이 역사 바로 근처에 큰 공원과 놀이터가 위치해 있었다. 구석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행을 가면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항상 하는 일 세 가지가 있다. 공원 가기, 놀이터 가기, 그리고 전망대 가기.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공원이자 놀이터인데 곤돌라를 타고 높이 올라온 덕에 여느 전망대 부럽지 않은 전경을 바라볼 수도 있다니. 좋아하는 일 세 개를 한 번에 이뤘단 생각에 마음이 흡족해졌다.
아래를 바라보니 제법 어두운 이곳과는 달리 부촌은 한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저 아래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 궁금한 마음에 주변을 살펴봤는데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주변엔 그저 행복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 자체로서 반짝이고 있었다. 놀이터가 떠나가라 웃는 아이와 그 순간을 놓칠까 카메라에 한 장 한 장 소중히 담고 있는 엄마 아빠. 행복이 별게 있을까, 지금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된 거겠지.
노을까지 모두 져 어둑해진 시간, 자연스레 코가 이끄는 곳으로 향해 곱창을 파는 노점상을 발견했다. 일 인분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 같이 먹으라며 넉넉히 아레빠까지 챙겨주는 주인 아주머니 인심. (식전 빵. 일종의 또르띠야) 이제야 이 도시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기는 아쉬워 맥주 한 병을 시켜 긴 시간 그 동네를 음미했다.
다시 곤돌라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부촌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위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별다른 빛이 없어 어두운 와중에 드문드문 위치한 가로등들이 마치 밤하늘 속 별처럼 보였다. 그런 장소였다, 그저 어두워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