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노동자와 예술가의 차이
거미는 직조공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인간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집을 짓기 전에 이미 머리 속에서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노동과정의 끝에 얻는 결과물은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사회와 무관한 고정불변의 인간 본성에 대해 반대하며, 인간 본성이 다양한 사회에서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며, 모든 인간 사회에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상대로 노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의식의 발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도입부에서 거미와 꿀벌의 노동과 인간의 노동을 비교하며 이를 설명했습니다. 거미와 꿀벌은 본능적으로 집을 지을 수 있지만 미리 계획하거나 상상하여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인간은 이미 머리 속에 집을 짓고 있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동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생산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피셔도 인간의 노동의 고유한 특징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연을 상대로 행동하여 기존의 성과를 이용하고 변형하여 필요한 것들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늘 발전하고 변화하는 존재이며, 인간의 본성은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 변형, 발전,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노동은 자연뿐 아니라 노동자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외부 세계를 상대로 행동하고 바꾸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성도 바꾼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노동자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하고 혁신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의식적인 노동하는 능력을 "종족의 본질"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인간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인간 본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적, 환경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의식적인 노동은 인간 본성의 핵심이며,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고 혁신하는 동력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본성과 노동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사회와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과 생산 방식의 발전은 인류 역사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입니다. 노동자들이 노동 방식을 개선하고 기존의 성과를 이용하는 능력 덕분에 생산력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사회는 잉여 생산물을 생산하게 되면서 계급 사회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도 남들의 노동을 통제해서 살아가는 계급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의 과정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통제력을 상실하는 결과도 가져왔습니다. 자연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노동의 발전은 생산자들이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의 소외가 계급 사회에서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에른스트 피셔는 이러한 과정을 탁월하게 묘사했습니다.
최초의 도구에는 미래의 잠재적 도구들이 모두 들어 있다. 의식적인 활동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최초의 인식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필연적인 미래의 변화가 모두 들어 있다. 자신의 손과 지성과 상상력을 이용한 노동으로 자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생명체는 결코 그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뭔가를 해낼 때마다 새로 개척해야 할 영역이 생겨난다. … 그러나 노동이 창조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면, 노동이 강압적으로 이뤄져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면, 노동으로 인간의 육체적·지적 잠재력이 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사한다면, 노동은 자신의 본질을,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부정하게 된다.
최초의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래의 잠재적 도구들이 이미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의식적인 활동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인식에는 미래의 변화들이 이미 숨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손과 지성, 상상력을 이용하여 자연을 개척해나갔으며, 이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이 창조적이지 않고 파괴적으로 이뤄지거나 강압적으로 이뤄질 경우,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며, 이로 인해 인간의 육체적이고 지적인 잠재력이 제한되어 고사례사하게 됩니다. 노동이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소외가 발생합니다.
계급 분화가 일어날 때, 한 계급이 사회에 필요한 생산수단을 지배하게 되면서 개인과 사회의 분리가 심화됩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개인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분리시킵니다. 이로 인해 사회 생활의 특정 형태가 "자아의 두 차원, 즉 개인과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양상을 띄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외는 모든 계급 사회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인간 조건이 아닙니다. 사회와 노동의 발전은 늘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소외를 줄이고 인간의 본질을 인정하는 사회적 변화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과 통제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의 발전과 사회 구조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해야 합니다. (다소 유토피아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
한편, 과거 인간 역사의 시대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산업과 과학의 힘이 인간의 삶에 나타났다. 다른 한편, 로마 제국의 공포를 능가하는 쇠퇴의 징후도 존재한다. 우리 시대에는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처럼 보인다. 인간의 노동을 덜어 주고 생산성을 높여 주는 놀라운 힘을 가진 기계가 있는데도 우리는 아사와 과로를 목격한다. 부의 최신 원천이 빈곤의 원천으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예술의 성공은 개성을 상실한 대가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는 예술이 빈곤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주장은 의미 있는 점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술가들이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거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활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술가들은 종종 예술적 표현과 창작을 위해 노력하면서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예술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개성을 잃고 주류에 따라야 한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예술은 단순히 음악가나 화가와 같은 전문 예술가들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예술은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창조적인 활동이며, 개발자의 코딩, 마케터의 마케팅 기획과 같은 일 또한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예술이 개인의 창의성과 능력을 통해 발전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실현하는 중요한 측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예술의 의미를 잃고 소외를 느끼는 것은 노동 과정에서의 소외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큰 물체의 일부를 반복적으로 조립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제품의 최종 결과물과의 연결고리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이 단순히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자아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질 수 있으며, 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은 생산 과정에서의 소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작업의 설계나 조건을 제어할 수 없고, 기계의 운동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노동의 방식을 결정할 수 없고, 자신의 노동이 기계와 함께 일종의 일부분으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또한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또한 노동자들의 예술적인 창의성과 소외를 관련시킬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임금을 위해 경쟁하고, 일이 모두가 함께 이익을 얻는 협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경쟁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능력과 창의성을 개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외 요인들로 인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예술적인 가치와 노동의 의미를 잃을 수 있으며, 노동시장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꿀벌이나 거미와 같은 존재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노동자들의 자아실현과 능력 개발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술의 의미를 잃고 노동시장에서 소외을 느끼는 경우는 노동자들의 창의성과 자아실현을 위협하는 문제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수공업과 매뉴팩쳐에서는 노동하는 사람이 도구를 이용하지만, 공장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이용한다. 전자의 경우는 인간에서 노동 도구의 운동이 시작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기계의 운동을 인간이 따라야만 한다. 매뉴팩쳐에서 노동하는 사람은 산 메커니즘의 일부다. 공장에서는 노동하는 사람과 독립해 있는 생명 없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인간은 단지 산 부속물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예를 들어 장난감), 그 제작 방법이나 만든 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통제할 수 없다면 그들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과정의 일부일 뿐이며, 그들의 노동의 결과를 볼 수 없거나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장인이 장난감을 만들고 직접 고객에게 팔아서 자신의 작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상황과는 다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네 가지 유형의 소외를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는 무엇을 생산하거나 어떻게 배포할지에 대한 의사결정권이 없으므로, 그들이 생산하는 것과의 연결고리를 느끼지 못합니다.
생산 과정에서의 소외: 노동자는 작업의 설계나 조건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개인이 아닌 기계의 일부분처럼 행동합니다.
자아로부터의 소외: 노동자가 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 그들 자신을 표현하거나 창의력이나 잠재력을 활용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사람들이 불만족감을 느끼고 덜 인간다운 상태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임금을 위해 서로 경쟁하므로, 일은 모두가 함께 이익을 얻는 협동 활동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노동)이 내 창의력을 이용하고 자아실현을 이루어주는 예술인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고민입니다. 또한 이 노동은 나에게 어떤 결과를을 초래할 것이고, 그것은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라는 질문도 던져보는 것이 좋습니다. 노동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며,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노동의 의미와 가치는 각 개인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노동이 창의력을 이용하고 자아실현을 이루어주는 예술로 느껴지는지는 모두의 개인적인 경험과 업무 내용, 환경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노동이 창의적인 영역이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노동이 단순히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작업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노동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인생을 향상시키고 행복감을 제공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하는지를 이해하고, 그 일에 대한 열정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사회가 그렇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기준이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고, 자신의 가치와 목표에 맞는 일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노동에 대한 의미를 찾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고민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노동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고,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탐구하는 것은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면서 자신의 가치와 역량을 발견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격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