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Aug 21. 2023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속 패션 세계(오펜하이머)

Stories: Christopher Nolan's Costume

Stories: Christopher Nolan's Costume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속 패션 세계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에 담긴 패셔너블한 순간을 포착하다.




집요한 리얼리즘


30만 평의 땅에 직접 옥수수를 심어 키우고 거대한 미식축구장의 바닥을 붕괴시킨 것도 모자라 멀쩡한 보잉 747 비행기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던, 놀란의 집요한 리얼리즘 사랑. 최근 국내 방송에 출연한 그는 이 유별난 행위에 대한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준다. “나는 관객이 영화를 통해 현실의 감각을 느끼길 바란다.“ 또한 ”실제가 그래픽 보다 공감되고 실제적이고 위협적이며 무게감이 있기 때문“이라 덧붙인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물리적 요소가 없는 화면에선 분명한 차이가 드러나니까.


<인터스텔라(Interstellar)>의 옥수수밭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의 미식축구장


<테넷(Tenet)>의 보잉 747기 충돌 장면 ⓒcinemablend.com, polygon.com


평소 느와르물을 선호한다는 놀란의 취향. 그의 창작 방식만 봐도 그 일관된 취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비선형 타임라인으로 시간과 사건의 순서를 뒤틀고, 이로부터 파생된 혼란과 모호한 분위기를 영화의 강점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물론 관객은 불안과 무력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바로 이것이 서스펜스의 특징이자 매력. 그는 플롯을 쪼개고 합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시너지를 영리하게 이용하여 관객을 영화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인다.



<인썸니아(Insomnia)>
<프레스티지(Prestige)> ⓒimdb.com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영상으로 담아내며 관객에 마음 속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영화감독"이라 전하며 자신의 신념을 밝힌 그. 나아가 그에게 미장센은 그 공간의 창조를 위한 토대나 다름없기에 각별히 신경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가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에서 병동 한 채를 주저 없이 폭파시켰던 이유를.

근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나 리얼리즘에 진심인데, 캐릭터들의 패션은 오죽하겠어?



ⓒmakeagif.com





오펜하이머의 탈을 쓴 킬리언


ⓒlatercera.com


놀란의 신작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개봉 2주 만에 한화 약 5108억 원의 엄청난 수익을 올리며 화제의 중심에 올라섰다. 물론 관객의 호평도 함께 말이다. 하지만 개봉 이전부터 주목을 받았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주인공 오펜하이머 역의 킬리언 머피(Cillian Murphy)와 실존 인물인 오펜하이머의 놀라운 싱크로율! 거의 메소드 연기가 아닌 메소드 패션 수준이었다.

이 높은 싱크로율의 이유는 킬리언 머피가 캐릭터를 대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가끔은 캐릭터의 외면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캐릭터의 실루엣, 체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킬리언 머피(좌), 로버트 오펜하이머(우) ⓒapnews.com


또한 영화의 의상 디자이너인 엘렌(Ellen Mirojnick) 역시도 캐릭터에 우아한 힘을 실어주려 노력했다. 마치 모두의 숭배를 받는 한 부족의 토템처럼 말이다. 이는 세계의 생사를 가르는 선택 앞에 홀로 선, 캐릭터의 딜레마와 고뇌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놀란은 당시의 패션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대신 관객의 눈에 유혹적인 캐릭터로 비추길 원했다.” 엘렌은 이러한 놀란의 요청을 전격 반영했다. 어깨를 활짝 폈을 때, 상체의 V자 모양 실루엣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남성적인 면모가 돋보이도록 했으며 실존 인물의 시그니처인 모자 역시 그대로 수용했다.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재킷의 품이 너무 벙벙하거나, 다소 짧은 넥타이, 높은 허리띠의 위치, 모자의 챙이 과하게 넓어 보일 수 있지만, 이를 최대한 패셔너블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앞서 공개된 몇 장의 스틸컷 만으로도 그녀의 성공은 이미 보장된 듯.


<오펜하이머(Oppenheimer)>의 스틸컷과 현장 사진 ⓒthe-sun.com, ⓒindependent.co.uk, ⓒwwd.com





슈트에 대한 집착


ⓒesquire.com


<테넷>은 엔트로피와 시간 여행, 아마겟돈, 환경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다. 이에 더해 주인공 로버트 패틴슨(Robert Pattinson)의 끝내주는 슈트 핏을 감상하는 재미까지 있다.

영화의 의상 디자이너인 제프리(Jeffrey Kurland)는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대거 출연하는 테넷의 시나리오를 먼저 철저히 분석하고, 각 캐릭터의 매력을 배가하기 위해 각각 다른 재단사를 고용하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부유함의 정도나, 성격, 움직임의 패턴에 따라 세상에 둘도 없을 맞춤형 슈트를 제작해 낸 것이다.



<테넷>의 촬영현장 ⓒesquire.com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수많은 액션신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배우들은 여전히 슈트 차림만의 품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멋지게 싸우는 것보단 싸우면서도 멋져 보여야 했던 것. 때문에 실용성과 시크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춰 의상을 고려해야만 했다. 타이를 포기하는 대신 화려한 스카프를 선택하거나 재킷의 이음새를 최소화한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인셉션(Inception)>의 명장면 ⓒesquire.com


이는 <인셉션(Inception)>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의 공간이라는 특수한 설정 때문에 의상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세심히 살펴야 했으니 말이다.

이 영화에서도 의상을 담당했던 제프리는 조셉 고든 레빗(Joseph Gordon-Levitt)의 360도 회전하는 복도 전투신을 위해 그의 슈트에 여러 장치들을 해 두었다. 재킷의 앞면에 뻣뻣한 안감을 덧대어 고정시키고, 옷이 펄럭이지 않도록 곳곳에 매듭을 지어두었으며 신발 끈은 철사로 묶어두기까지 했다. 그래야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꿈의 공간이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인셉션>의 모든 캐릭터와 함께 ⓒfromtailorswithlove.co.uk





세상에서 제일 악랄한 패셔니스타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영원불멸하다. 예측할 수 없는 캐릭터의 매력과 이를 훌륭히 소화해 낸 연기력은 물론이며, 매번 핼러윈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할 정도의 수려한 아웃핏을 가졌으니까. 초록과 보라의 조합만 봐도 곧바로 조커를 떠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처럼.



ⓒesquire.com


당시 의상을 맡았던 린디(Lindy Hemming)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를 차별화시키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89년, 팀 버튼의 배트맨 속 잭 니콜슨(Jack Nicholson)이 연기한 조커가 채도 높은 보라 중심의 선명한 의상을 선택했다면, 히스 레저(Heath Ledger)의 조커는 보라와 초록의 채도를 다운시켜 풍기는 아우라 자체를 암울하고 냉랭하게 바꾸어 놓았다. 장난스러운 광대의 모습 대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영혼의 상처가 느껴지는 위태로운 존재로 보이게끔 만든 것이다. 학대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서툰 분장과 빈티지한 슈트들은 조커에 대한 편견을 깬 새로운 스타일의 캐릭터로 재탄생 시켰다.



잭 니콜슨(좌)과 히스 레저(우)가 맡았던 조커 ⓒscreenrant.com


린디는 조커를 록스타에 빗대어 설명한다. 피트 도허티(Pete Doherty)나 이기 팝(Iggy Pop), 조니 뎁(Johnny Depp)과 같이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로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리는, 범상치 않은 능력의 소유자처럼. 때문에 의상 구성에 있어 많은 부분을 그들의 패션과 애티튜드에서 영감을 받았다 밝힌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영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역사에 각인되었다.



이기 팝(좌)과 조니 뎁(우) ⓒsalon.com, ⓒvogue.com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성지


ⓒcinephiliabeyond.org


한 분야의 덕후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사소한 디테일까지 완벽히 고증해 내어 국내 밀덕들의 찬사를 받았던 <덩케르크(Dunkirk)>. 그중에서도 육해공 전부를 아우르는 군복 패션은 그들에겐 교재로 통할 만큼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특히 군복이 남성복 시장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영화 속 제복 패션은 단순히 ‘전투용‘이라고 치부하기 아까울 정도다. 최근 가장 세련된 전쟁 영화라는 극찬을 받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thomasmason.co.uk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왜 우리는 그 암울한 전쟁통 속 옛날 군복 따위에 끌리는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다. 변치않는 권력의 표식이자 실용성의 끝을 달리는 탁월한 구성 때문이다.

기능성을 빼놓고는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군복은 거의 90프로는 안전성과 편리함에 몰빵한 의류다. 잘 보면 버튼 하나, 포켓 하나 허투루 달린 게 없다. 흔히 건빵 주머니라 칭하는 벨로즈 포켓(Bellows Pocket)은 수납력의 극대화를 위해 압력계의 아코디언 형태에서 착안한 것이며, 해군 사령관의 네이비 피 코트(Pea Coat)는 차디 찬 겨울 해풍을 막기 위해 뒤통수까지 덮을 수 있는 라펠을 달았다. 오롯이 실용성만을 고집해 만들어진 디자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이런 것을 보고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의상만으로 계급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확실한 권위 표현도 오직 군복만이 가진 매력이다. 어깨의 견장이나 모자의 각, 셔츠의 주름 만으로도 상대의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니. 이 독보적인 특징 덕분에 군복은 전쟁이 끝나고 수 십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신선한 영감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근원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잊지말자.



LEMAIRE 2017 SS


BURBERRY PRORSUM 2010 FW ⓒvogue.com





고독한 사람들은 무엇을 입나요?


ⓒimdb.com, ⓒ네이버영화




마지막으로 놀란의 초기작의 이야기를 해 보자. 지금처럼 엄청난 제작비 없이도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냈던 그 시기, 장편 데뷔작인 <미행(Folloing)>과 참신한 구성이 돋보이는 <메멘토(Memento)>는 놀란의 존재감을 전 세계의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스릴러란 장르를 이처럼 다채롭게 연출할 수 있는 감독이 있다니!


<미행>의 스틸컷 ⓒimdb.com




실업자인 빌이 도둑인 콥을 미행하다 겪게 되는 사건을 다룬 작품 <미행>. 이 영화에서의 의상은 주인공 빌이 앞으로 돌이키지 못할 사건에 휘말리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와 같다. 수더분한 차림으로 거리의 사람을 미행하며 시간을 때우던 빌이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둑 콥의 조언으로 메이크 오버를 결심하게 되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빌은 그 이후 더욱 콥의 방식을 의지하게 되며, 점점 사건에 가까워진다. 무섭도록 스타일리시한 올블랙의 슈트를 휘날리며 말이다.

그렇다면 <메멘토>는 어떨까? 여기서의 옷은 단기기억 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온몸에 문신으로 새겨 넣은 자신의 정보들을 외부에 섣불리 노출시키지 않게 하는, 바리케이드 역할을 한다. 이는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독특한 플롯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옷 안에 힌트를 감추고, 극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알려주는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후반에 밝혀지는 충격적인 비밀의 복선이 되기도 하는데… 영화의 시작점, 주인공의 베이지 슈트는 원래 누구의 것이었던가?


<메멘토>의 스틸컷 ⓒbamfstyle.com


미국판 지식인인 Quora에서 놀란에 관련한 재미난 질문을 찾았다. “왜 크리스토퍼 놀란은 촬영 현장에서도 항상 코트나 정장 재킷을 입나요?” 이에 대한 놀란의 답변은 이렇다.

“나는 교복을 입어야 하는 기숙학교를 다녔고, 재킷에 달린 주머니를 빠짐없이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그냥 내가 편한 것뿐이다. 사실 뭘 입을지 고민하기 싫어서 매일 같은 것만 입는다.” 의외의 이유로 탄생한 놀란의 스타일 철학. 아무래도 그의 영화 속 패션 세계를 탐구하는 건 감독 본인의 패션을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할 듯.


ⓒvulture.com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entestore 바로가기

작가의 이전글 패션에 찾아온 자유와 혁명의 순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