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와르 영화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패션 코드
Stories: Fashion and Noir Film
잔혹한 세계에서 패션으로 승부하기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복수와 배신, 폭력과 혈흔이 난무하는 무자비한 세계, 느와르. 그 거칠고 잔혹한 냉기가 패션에 침투했을 때.
프랑스어로 검은색을 뜻하는 느와르(Noir). 영화에선 도덕적 경계가 허물어진 범죄와 폭력의 세계를 다루는 장르를 뜻한다. 1946년, 프랑스의 비평가 니노 프랑크(Nino Frank)가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느와르의 시대 역시 함께 열리게 된다.
가끔 느와르를 조폭 영화라고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분명한 오판이다. 느와르에서 중요한 건 내용보단 분위기.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어두운 무드가 영화의 장르로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내용 역시 인간의 불편한 면모를 부각하는 쪽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대다수며, 극한의 상황 속 날뛰는 본능과 목적을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에 주목한다.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해도 더 나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범죄의 굴레. 느와르는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의 날개 없는 추락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장르인 것이다. 결말 역시 배드 엔딩이 대부분. 빛이 사라지고 나면 흔적조차 남지 않는, 그림자의 비극처럼 말이다.
혼자서도 잘하는 시네필들은 제외, 본격 느와르 초심자를 위한 영화 세 편을 본문에 앞서 미리 추천한다. 전설의 마피아 알 카포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스카페이스(1984), 파고와 노인을 위한 나라를 없다로 거장의 자리에 올라선 코엔 형제의 데뷔작 블러드 심플(1984), 한국판 느와르의 초석을 다진 달콤한 인생(2005). 이 세 편은 치열한 느와르 필름의 경쟁 속에서 간택 받은 에디터의 추천작이다.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당장 그 눈을 뺏고 싶을 정도로.
모든 장르엔 저마다의 법칙이란 게 존재하는 법. 느와르 역시 예외일 순 없다. 지금부터 닮은 듯 다른 개성만점의 캐릭터들을 차례로 짚어보며, 그 안에 숨겨진 패션 코드도 덤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느와르 주인공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 본의 아니게 살벌한 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게 되는 것이 바로 주인공들의 서글픈 운명이다. 하지만 신은 늘 공평하시니, 온갖 풍파를 그들에게 몰빵한 보상으로 대신 뛰어난 전투 능력을 선사해 주셨다. 대체 총알이 몇 개 인지 쏴도 쏴도 줄지를 않는 데다, 17대 1은 우습게 쓸어버리는 그들. 엄청난 파괴력과 매우 좋은 운까지 타고났다.
보스의 애인을 '몰래' 짝사랑한 걸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매장까지 당할 뻔한 달콤한 인생의 가여운 선우(이병헌), 대부의 양아치 버전인 스카페이스의 악랄하고 비열한 마피아 보스 토니(알 파치노), 남의 반려동물을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 준 존 윅(키아누 리브스), 리 플리컨트의 반란에 맞서 미래 세계의 평화를 지켜내는 블레이드 러너의 릭(해리슨 포드)까지. 느와르에 있어 절대 빠져선 안 될 캐릭터 1순위는 바로 생존능력 몰빵형 캐릭터다.
게다가 그 차림새는 또 얼마나 멋진지. 정장 차림으로 싸우려면 꽤나 불편할 텐데 타고난 아우라 덕분에 모든 게 용납되는 그들의 액션은 보는 내내 감탄을 자아낸다. 선우와 존 윅의 테일러링 패션은 조폭과 킬러라는 무시무시한 직업에 한결같은 우아함을 더하며, 뒷골목 보스치곤 너무나 센스 있는 패션 감각을 보여준 토니의 화려한 아웃핏은 그의 포악한 성격 속에 내재된 섬세한 이면을 드러낸다. 특히 스카이블루 슈트 셋업은 두고두고 화자가 된 스타일링.
복수는 나의 힘. 소중한 사람을 위해, 때론 꺾이지 않을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진 주인공들도 느와르에선 자주 목격된다. 비록 그 여정이 외롭고 고될지라도 말이다.
15년 동안 골방에 가둬놓고 군만두만 먹인 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올드보이의 대수(최민식), 마치 약 올리듯 메시지를 던져놓는 악질의 연쇄살인범을 쫓는 세븐의 서머셋(모건 프리먼)과 밀스(브래드 피트),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레옹(장 르노)과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조(호아킨 피닉스), 드라이브의 라이언 고슬링처럼 집념 강한 캐릭터는 느와르 필름의 단골손님.
올드보이의 오대수, 세븐의 서머셋 형사
ⓒfilmschoolrejects.com, ⓒimdb.com
이들의 패션에서 눈에 띄는 외적인 공통점은 없지만, 분명한 건 모두 한 개성 한다는 거다. 특히 철 지난 쓰리버튼 정장을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대수와 무심히 걸친 후드 베스트와 캡모자가 왠지 모를 능력자 포스를 풍기는 조. 이 둘은 배우의 아우라가 엉망진창인 패션을 삼켜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반면에 라이언 고슬링의 현란한 스카잔과 그 자체로 스타일 아이콘이 되어버린 레옹의 숏비니 + 선글라스 조합은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아웃핏.
하지만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 바로 세븐의 브래드 피트. 아무리 패션의 완성이 얼굴이라 할지라도 유니크한 색상과 패턴의 넥타이, 다양한 소재의 아우터들의 조합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착장. 변화무쌍한 뉴욕의 날씨와 끔찍한 사건 현장에서도 그를 반짝이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그렇다면 이 불쌍한 주인공들을 신명 나게 괴롭히는 빌런은 대체 어떤 놈들일까?
느와르의 속의 빌런들은 대부분 서사가 결여된 평면적 인물로 그려진다. 대신 모두 하나같이 근본 없는 개똥철학을 단단히 탑재하고 있는데,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치밀하고 견고하게 설계된 그 비전이 그들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 된다. 그들은 타 장르의 빌런들보다 배는 못되고 배는 극악무도해야만 하는 슬픈 운명을 타고났는데, 왜냐하면 관객에게 일말의 동정심조차 허용해선 안되기 때문. 느와르에선 주인공을 향한 감정이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택시 드라이버의 미워할 수 없는 빌런,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 그는 밤거리를 차지한 쓰레기 같은 인생들을 언젠가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비틀어진 야망을 가진 택시 운전사다. 그릇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는 영화의 말미, 정말 분리수거조차 안 되는 인물들을 모조리 처단하는데 성공하지만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역시 트래비스와 쌍벽을 이루는 엄청난 빌런이다. 오직 자신의 논리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에겐 타인을 위한 배려란 조금도, 정말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그는 사람이라기보단 '우연히 닥치는 재앙' 자체를 의인화한 캐릭터로 해석된다. 생각해 보아라. 일말의 자비도 없던 희대의 재앙들을. 그리고 그게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하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그들에게도 단 하나의 막강한 킬링 포인트가 존재했으니 바로 패션 감각이다. 트레비스의 유틸리티 재킷과 모히칸 헤어, 안톤 쉬거의 찰랑이는 단발머리와 데님 재킷 착장은 한 번 보면 웬만해선 잊지 못할 인상적인 모습. 끝으로 레옹을 찰거머리 같이 뒤쫓는 악질 경찰, 스탠스필드(게리 올드만)의 베이지 슈트룩도 기억에 남는 착장이다. 빌런의 패션치곤 너무 세련되었잖아.
지금부터는 열혈남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캐들의 열전이다. 이들을 위해서라면 주인공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정도라니, 대체 어떤 매력이 숨어있길래?
우선 레옹 못지않은 스타일 아이콘인 마틸다(나탈리 포트만). 그녀 역시 독창적인 아웃핏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그니처인 항공 점퍼와 초커, 부츠의 조합은 걸리쉬한 펑크 무드를 너무나 잘 적용한 베스트 코디. 또한 올드보이 속 미도(강혜정)의 착장 역시 놓쳐선 안된다. 영화의 수려한 미장센 속 독특한 패턴, 색감과 어우러지는 의상 선택이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니까.
하지만 역시 베스트는 아마 펄프 픽션의 미아(우마 서먼)가 아닐까. 칼단발과 블랙 롱 드레스, 화이트 셔츠의 단순한 차림만으로 온 동네 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니 말이다. 뭐, 댄스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자, 이제 느와르 속 가장 큰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바로 뭣도 모르고 빌런에게 충성하다가 주인공에게 제대로 발리는 가여운 친구들 말이다. 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지만, 나름 열심히인 면도 있어서 애처로운 마음까지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명작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의 갱들처럼 말이다. 끊임없는 의심과 배신의 연속. 그 안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해프닝들. 이것이야말로 느와르의 가장 큰 별미가 아니겠는가?
영화뿐만이 아니다. 한 편의 느와르라 해도 손색없을 게임 GTA(Grand Theft Auto)에서도 안쓰러운 갱과 폭주족들이 등장한다. 넘치는 미션의 바다에서 뭐라도 성공하지 못하면 사망, 사망, 사망. 도무지 맘 편히 죽을 수 없는 이들의 영혼은 대체 누가 달래준단 말인가?
하지만 종종 힘숨찐의 진가를 보여주는 캐릭터들도 나타나는데, 지상 최고의 빌런 안톤 쉬거를 상대하는 노인을 위한 나라의 히로인 르웰린(조슈 브롤린)과 파이트 클럽의 잭(에드워드 노튼)이 그렇다. 특히 잭은 제대로 된 정신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명성 높은 파이트 클럽의 리더까지 꿰차버리니까.
어쨌든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선 안 되는 법. 그들 역시 나름의 컴플렉스를 가리기 위해 있는 힘껏 치장에 열을 올렸으니. 저수지의 갱들 속 말끔한 블랙 정장과 GTA의 정통 스트리트 패션, 나아가 르웰린의 찐 웨스턴 스타일 착장과 파이트 클럽의 두 주인공의 패션은 스스로의 결핍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무료한 일상룩에 특별한 변화를 갈망할 그대여, 이번엔 한 편의 느와르 필름 속 주인공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그 전에 약속 하나 하자. 반드시 패션 만이다. 만약 그들의 행실까지 닮는다면... 정말 곤란하니까.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