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제과 유학을 하며 다양한 제과점을 방문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 다섯 가지를 뽑아보았다. 날씨나 계절에 따라서 좋아하는 디저트가 바뀌곤 해서 다음번에는 리스트가 바뀔 수도 있다. 그래도 여기에 선정된 디저트는 여러 번 맛보았던 것들이기에 파리에 여행 온다면 한 번쯤 방문해보셔도 좋겠다는 마음에서 정리했다.
칼 말레티 - 릴리벨리
파리에서 좋아하는 제과점을 뽑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칼 말레티.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절, 우연히 길을 걷다 칼 말레티를 발견했다. 그땐 이 가게가 유명한 곳인지도 몰랐고 길에서 마주친 이름 없는 가게였다. 레몬 타르트와 포레누아를 먹으며 '역시 파리는 아무데서나 먹어도 디저트가 맛있구나' 싶었다.
칼 말레티는 정석 코스를 착실히 밟은 파티시에라고 볼 수 있다. 80년대에 르 노트르에서 스타쥬를 시작하고 여러 제과점을 거쳐 호텔 셰프가 된 후 주목을 받고 2007년 본인의 이름을 건 제과점을 열었다. 현재 그의 가게는 프랑스 잡지에서 파리의 제과점을 주제로 글을 쓰면 빠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도 레몬 타르트, 밀푀유, 프레지에 등 기본기가 착실한 파티시에라고 생각한다. 칼 말레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는 릴리 밸리.
릴리 밸리 Lilly Valley
릴리 밸리는 외관만으로도 충분히 구매할 가치가 있는 제과다. 앙증맞은 슈에 풍부한 크림, 자수정 같은 설탕 장식까지. 액세서리를 보는 느낌이다. 라벤더를 제과로 표현하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색감이 은은하게 구성되어 볼 때마다 참 예쁘다.
크림은 바이올렛 향이 은은하게 난다. 우유맛과 크림 특유의 고소한 맛이 좋다. 과하게 달지 않다.
부드럽고 달콤한 크렘 파티시에르가 들어간 슈, 새콤한 카시스 잼, 버터 풍미 가득한 파트 사블레의 맛들이 이어진다. 그 과정이 능수능란하게 펼쳐 저 입속은 행복하다.
식감도 다채롭다. 크림은 구름처럼 녹아내리고, 설탕은 오독오독 씹힌다. 슈와 크렘 파티시에르는 퐁신퐁신, 파트 사블레는 바삭바삭. 디저트에 여러 질감을 시도하는 파티시에의 도전은 먹는 이에게 즐거움을 준다.
파리 최애 디저트 중 하나인 릴리 밸리는 강력 추천!
피에르 에르메 - 이스파한
피에르 에르메. 그 이름을 빼놓고 현대 프랑스 제과를 논할 수 있을까. 그는 '식사 후에 먹는 달콤한 무언가'에 불과했던 디저트를 그 자체만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오뜨 꾸튀르 Haute-Couture(예술을 위한 패션 혹은 하이패션)에 상응하는 오뜨 파티스리 Haute-Patisserie(예술을 위한 제과)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피에르 에르메다.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이스파한 풍미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독특한 맛을 담은 마카롱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제과 산업을 보다 보면 피에르 에르메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흘레 데세흐를 비롯해 여러 단체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후배를 키우는 일에도 열심히여서 학교 고문 역할도 많이 맡는 듯하다. 알면 알 수록 멋진 파티시에.
이스파한 Ispahan
이스파한은 한입 먹는 순간 장미향이 향긋하게 퍼진다.
얼마 전 방문한 장미공원에서 어디선가 피에르 에르메 제과 향기가 솔솔 났다. 가까이 가니 예쁜 장미가 있었고, 이름은 이스파한이었다. 그만큼 이스파한 장미 본연의 향을 잘 살린 제과. 피에르 에르메에서 인턴을 했던 친구가 말하길 작업실에 장미방이 따로 있다고 한다. 매혹적인 장미향을 만들어 내려는 열정에 감탄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아 먹을 때마다 감탄한다. 바삭 진득한 마카롱 꼬끄의 식감과 이어지는 과즙 가득한 라즈베리와 리치, 쫀쫀한 크림에 이어 다시 마카롱 꼬끄로 향하는 식감의 여정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맛의 조화도 좋다. 마카롱 꼬끄에 밴 은은한 장미향이 달콤하고 새콤한 라즈베리와 달콤한 리치와 잘 어우러진다. 기분 좋은 장미향으로 가득한 크림이 지휘자처럼 전체를 감독한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데 갸또 에 듀 빵 - 빰쁠르무스 로사
데 갸또 에 듀 빵을 번역하자면, '케이크와 빵'이다.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름에서 자신감이 느껴진달까. 셰프인 클레르 다몽은 프랑스 제과를 이끄는 단체인 흘레 데세흐Relais Desserts 의 유일한 여성 멤버이기도 하다. 맛을 섬세하게 다루고 외양을 예쁘게 구성하기로 유명하다.
참고로 흘레 데세흐는 프랑스 제과의 가치를 지키고자 설립된 단체이며, 피에르 에르메가 단체장을 맡기도 했다. 제과학교인 ENSP가 흘레 데세흐의 본부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 파리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제과점은 데 갸또 에 듀빵(이하 데갸또)이다. 집과 가깝기도 하고 맛도 좋아해서 디저트를 먹고 싶을 때면 곧잘 가곤 한다.
케이크와 빵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과 말고 빵도 유명하다. 천연발효종 Levain을 사용해 만드는 빵 역시 맛있다.
빰쁠르무스 로사 Pamplemousse Rosa
자몽과 장미를 활용한 앙트르메. 전체적으로 식감이 부드럽게 구성되었다. 피에르 에르메의 이스파한과 비슷하면서도, 리치 대신 자몽으로 변주했다. 은은한 장미향과 달달한 무스, 새콤 쌉싸름한 자몽 과육 젤리가 조화롭다. 위에서 아래까지 단단한 식감은 거의 없고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분홍 카카오버터를 뿌려 색감이 예쁘다.
데 갸또를 대표하는 제과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위고 & 빅토르 - 밀푀유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위고 & 빅토르.
셰프 파티시에인 위그 푸제 Hugue Pouget는 바로 그 대문호의 이름을 따서 가게 상호를 지었다. 작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파리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게 이름을 처음 들으면 엄청나게 오래된 가게라는 착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위고 & 빅토르는 2010년 문을 열었다. 호텔 브리스톨, 기 사부아 레스토랑, 라 뒤레 등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아시아, 남미 등을 여행하며 또 다른 맛의 세계를 탐구했다. 결과적으로 그때 쌓은 경험이 현재의 위고 & 빅토르를 만드는 일에 기여했을 것이다.
여행을 하며 익숙하지 않은 맛을 탐구하는 경험이 파티시에에게 얼마나 큰 자산일까, 라는 생각을 한다. 단지 스토리텔링을 위해 넣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성공한 셰프 중 다수는 여러 곳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맛본 새로운 맛을 자신의 디저트와 요리에 활용한다고 말했다. 늘 맛보는 요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합된 맛을 체험하면 큰 도움이 된다.
여러 맛에 도전해봐야겠다는 다짐!
바닐라 밀푀유 Millefeuille Vanille
맛있다. 끝.
이렇게 써도 좋을 정도로 맛있던 밀푀유 바닐라. 위아래 크림을 다르게 구성했다. 크렘 레제와 가나슈로 구성해 풍미를 더했다. 은은하게 달면서 풍부한 크림의 맛이 훌륭하다. 크렘 레제와 가나슈는 식감도 달라서 식감적으로도 흥미롭다. 크렘 레제의 부드럽고 경쾌한 리듬과 가나슈의 꾸덕하고 견고한 리듬이 훌륭한 앙상블을 이룬다. 푀유테에 곁들여진 카라멜이 유머를 더한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만들어진 제과. 기본을 충실히 지키면서 품위를 잃지 않은 맛이다.
파트 푀유테가 갓 구운 것처럼 바삭하지는 않지만 층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크림과 가나슈에서 나온 습기를 흡수한 푀유테는 살짝 뭉근하지만 여전히 층층이 쌓인 겹은 입을 즐겁게 해 준다. 세월을 흡수하듯 크림을 받아들인 푀유테는 좋은 취향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꾸민 중후한 신사 같다.
르 자흐당 슈크헤 – 피스타치오
르 자흐당 슈크헤는 '달콤한 정원'이라는 뜻. 멜라니 레흐티에Mélanie L'hértier와 아흐노 마테Arnaud Mathez 커플이 2012년부터 운영하는 제과점이다. 그들은 원재료가 유명한 곳의 재료를 살려 제과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가게를 열었다. 지금까지도 멍통Menton 레몬, 마다가스카르의 바닐라 등을 활용한 제과를 만든다. 재료 본연의 향을 살린 마카롱도 강점이다. 마카롱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방문해보기를 추천드린다.
처음으로 방문했던 2019년에 맛보았던 피스타치오-오렌지꽃 타르트는 충격적이랄 정도로 맛있었다. 제과의 질감, 풍미 모두가 취향 저격!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맛을 떠올리며 제과를 만들었을 정도로 영감을 주었던 제과였다.
피스타치오-오렌지꽃 Pistache-Fleur d'orange
단짠단짠의 정석! 고소한 피스타치오 향이 폭발한다. 오렌지 꽃 향이 향긋하다. 지난번엔 오렌지 향이 조금 더 강했던 것 같다. 옅어지니 더 조화로운 듯. 고소하고 상큼한 가운데 피스타치오 가나슈가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달콤하게 중심을 잡아준달까. 타르트지가 다른 가게에 비해 얇은 편이라 더 좋았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스타치오 프랄리네가 이곳의 특징이다. 부드러우면서 미세하게 바삭거리는 식감이 있어 흥미롭다. 풍미와 식감 모두 내 취향이다. 완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