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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최양 Feb 07. 2023

통렬한 블랙코미디의 근본,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변신 · 시골의사 외 30편

카프카적 판타지의 극치인, 그 유명한 그레고르의 변신 이야기를 읽기 위해 21년도 초에 민음사의 카프카 단편집을 샀다. 변신만 읽고 머리맡에 방치했던 단편집을 책장에 정리하려 완독하고자 책을 다시 들었고, 마음을 울리는 그의 블랙코미디에 몇날며칠을 광광댔다.


짧은 글에서 엿보이는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사실적인 기술, 간결한 문장이 때로는 쉼표로, 세미콜론으로 길게 이어지고 서술은 피상적인 단언을 피하며(나도 글을 쓸 때 그러려고 한다. 각자에게 맞는 해석을 낳는 모호함을 추구한다.) 한번 서술한 사실을 뒤집어보고 또 뒤집어보는 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는 <옆 마을>의 마지막 문장에서 잘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한 젊은이가—우연히 맞닥뜨린 횡액이야 제쳐놓더라도—별탈없이 흘러가는 평범한 나날조차도 그런 나들이를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점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어떻게 옆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작정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으로 말이다.

민음사의 《변신·시골의사 p.175


단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편, <옆 마을>은 마지막 문장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은 매우 간결하게 끝나지만, 마지막 문장은 쉼표와 줄표로 길게 이어지고 3~4번에 걸쳐 뒤집어보아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  젊은이는 별탈없이 흘러가는 평범한 나날조차도 그런 나들이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2. 하지만 젊은이는 그점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옆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작정을 한다.

3. 옆 마을로 나설 작정을 한 젊은이를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위 1번 문장도 "젊은이는 별탈없이 흘러가는 평범한 나날과 그렇지 않은 날이 있다."와 "젊은이는 평범한 나날조차도 나들이를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로 나눌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줄표 안의 표현까지 포함하면 더욱 세밀하게 쪼갤 수 있다. 이처럼, 카프카는 몇 문장을 통해 뒤집어서 읽어보고 또 다시 생각해보라고 읽는 이를 독려한다.



카프카의 이러한 문체는 살아내려 애쓰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극복”을 비유로 표현하는 점에서 이상의 글을 떠오르게 하고, 인간의 짐승스러운 요소를 말하는 <학술원에의 보고>에서는 조던 필 감독의 최근작 놉이 생각나게 한다.




이때 뚜—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뜻였다.

이상의 《날개》 중




원숭이다움과 지금의 저 사이에는 오 년 가까운 세월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달력으로 재면 짧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해왔듯이, 박차를 가해 달음질치기에는, 무량무변의 긴 시간이었습죠, 구간에 따라서는 탁월한 인간, 충고, 갈채 그리고 오케스트라 음악이 동반되었습니다만, 근본에서는 혼자였습죠,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경관에 머무르기 위해, 멀리 차단 목책 앞에 멈추어 있었으니까요.

가면을 쓴 원숭이(1994, 알버트 왓슨 작)

(중략)

야생 동물들을 그런 식으로 가두어놓는 것은 금방 잡힌 시기에는 장점이 있다고들 생각하는데, 이것저것 겪고 보니 저도 이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의미에서 실제로 그러한 경우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생각을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난생처음으로 출구가 없는 상황에 처했던 겁니다.

(중략)

소리 죽여 흐느끼기, 고통스러운 벼룩 수색, 야자 하나를 지치도록 핥기, 머리로 궤짝벽을 짓찧기, 누가 가까이 오면 혀 내밀기—그런 것이 새로운 생활에 있어서의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갖 짓을 다 해봐도 출구는 없다는 그 한 가지 느낌뿐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원숭이답게 느꼈던 것을 제가 오늘에 인간의 말로 그릴 수가 있고 또 그럼으로써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비록 제가 옛날의 원숭이의 진실에 더 이상 이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저의 기술의 방향에는 그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민음사의 《변신·시골의사 p.105



총을 든 원숭이(1992, 알버트 왓슨 작)

특히, 원숭이다움과 인간다움 사이에서 출구를 찾는 <학술원에의 보고>는 각자의 뛰어넘어야 하는 경계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카프카 단편 중 필자의 최애이기도 하다.

참고로 두 장의 사진은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되는 마에스트로, 알버트 왓슨 사진전》에 전시된 작품을 직접 촬영한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몇 단편은 신화를 소재로 하는데 기존 내용을 비틀어 재밌게 표현한다. 신화를 차용하는 글임에도 겉보기 이상의 진실, 즉 결국 현실을 전달하려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결국 여기에서도 삶에 대한 중압감과 현실을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은 <프로메테우스>와 <사이렌의 침묵>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프로메테우스에 관하여서는 네 가지 전설이 있으니(중략) 네번째에 의하면 한도 끝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에 사람들이 지쳤다고 한다. 신들이 지치고, 독수리가 지치고, 상처도 지쳐 아물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그 수수께끼 같은 바위산이었다.—전설은 그 수수께끼를 설명하려 한다. 전설이란 진실의 바탕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전설은 다시금 수수께끼 가운데서 끝나야 한다.

민음사의 《변신·시골의사》 p.206





사이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오디세우스는 귀에 밀랍을 틀어막고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했다.(중략) 그는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 사슬을 완벽하게 믿었고 자기가 찾은 작은 도구에 대한 순진한 기쁨에 차서 사이렌들을 마주 향하여 나아갔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표현해 보자면, 그들의 침묵을 듣지 않으면서, 그들이 노래를 하는데도 자신이 그 노래를 못 듣도록 지켜져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얼핏 먼저 그녀들의 고개 돌림, 깊은 호흡, 눈물이 가득 찬 눈, 반쯤 열린 입이 보였는데 그는 그것이 들리지 않게 자기를 감돌며 사라지는 선율의 일부라고 믿었다.

(중략)

아무려나 여기에 덧붙여진 이야기 하나가 추가되어 전해진다. 오디세우스는 워낙 꾀가 많아, 워낙 여우 같은 사람이라 운명의 여신조차도 그의 가장 깊은 마음은 꿰뚫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비록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서는 알 도리가 없으나, 사이렌들이 침묵했었다는 것을 정말로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가상의 과정을 다만 어느 정도 방패로써 사이렌들과 신에게 들이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민음사의 《변신·시골의사》 p.208


충격이지 않은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름다운 괴물 세이렌(파르테노페)과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 이렇게 덧붙이다니 말이다. 정말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 뱅글뱅글 도는 강아지처럼 끊임없는 자기객관화가 나를 깎아내리고 세상을 두렵게 한다.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는 고전에 맘이 매우 동한다. 그 처음은 헤세의 데미안이었는데, 그다음은 카프카의 단편들이다. 끝까지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카프카는 모든 작품에서 인생에 대한 고뇌를 보여주며,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은 그의 자기검열을 엿보게 한다. 그래서 그의 글에 마음이 동하는 것 같다.


연초부터 맘을 다잡게 하고 삶의 방향성과 인생의 출구에 대해 고민하도록 하는 책을 읽어 다행스럽다. 가끔은 인생이 무력하게 느껴져도 스스로 "성장을 위한" 자기검열까지만 허용할 것(갑자기?). 마지막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가장의 근심>을 추천한다. 자기비하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정신 차리고 또렷히 사는 한해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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