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변신(1915)≫ 2회독.
지난 6월 재독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1942)≫에는 '키릴로프'라는 장(chapter)이 있다. 거기에서 카뮈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악령(1871)≫을 중심으로, 불멸을 믿지 않는 절망자에게는 인생 자체가 완전히 부조리이며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 어떤 의미에서 복수이고 의지의 방식임을 말한다. 카뮈가 20대에 쓴 맑고도 투박한 젊은 철학서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실존과 부조리를 묘사하는 선학(先學)이기 때문이겠다. 그는 자신의 '부조리'에 대한 논조를 우리네의 실제 생활과 선학들의 작품을 통해 확고히 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부록에서까지 <도스토옙스키와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통한 부조리한 창조에 대한 비평을 이어간다. 하지만 사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글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이다. 원래 본문에 포함되어 있던 이 글은, 카프카가 유대계 체코 작가이며 그의 소설들이 지배 권력을 비판했기에 독일군의 검열을 우려하여 칼리마르 출판사로부터 삭제가 강권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카뮈가 도스토옙스키와 더불어 카프카를 본인의 첫 철학서에서 강하게 등장시키고자 한 이유는 무얼까? 이 또한 앞선 것과 동일하겠다. 세 작가는 다른 목소리와 다른 표현으로, 하지만 비슷한 갈래의 실존과 부조리를 보여준다.
나는 지금의 직업으로 직종을 변경한 후 첫 이직 시기에 카프카의 ≪변신≫을 '정확하게' 첫 회독했다. 많이들 그렇듯 나도 ≪변신≫을 통해 카프카를 처음 만났다.
'정확하게'라는 표현을 덧붙인 건,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판본은 ≪변신≫과 다수의 단편이 포함된 세계문학전집 형태였는데, 이직 전 회사에 첫 출근을 하며 들고 가서 ≪변신≫만 읽고는 퇴사일까지 방치해두었다가, 이직을 하며 얻게 된 짧은 휴식기에 책의 완독을 위해 다시, 이제야 '정확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처음 읽은 건 이직 전 회사에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병렬로 읽는(함께 보던 책만을 보았기 때문에 병렬로 읽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책은 계속해서 바뀌는데 이 책만은 책갈피의 위치가 그대로인 상태로 첫 출근일부터 퇴사하는 날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입사 초여서 바쁘고 정신없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나에게 첫 카프카는 임팩트가 없었던 것 같다.
오래 방임한 책을 얼른 훑고는 아무래도 인생의 마지막 긴 휴가일 것 같은 남아 있는 때를 다양한 작품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오래 쥔 책을 얼른 다시 책장에 꽂으려고 거의 강제로 펼치게 되었는데, 마음을 울리는 그의 블랙코미디 폭격에 몇날며칠을 광광댔다. 나는 ≪변신≫을 그저 우화를 읽듯 '벌레 이야기'로만 읽었구나!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러고는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했다. 읽은 걸 단상으로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긴 글로, 누군가에게는 우스울 정도로 장황해 보일지 몰라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끓어올랐다.
그래서 나의 브런치스토리의 첫 게시물은 카프카에 관해서이다.
https://brunch.co.kr/@jeolmeun-mschoi/1
읽는 이에게도 책임을 지게 하는 모호한 단상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때도 ≪변신≫보다 다른 단편들에 더 꽂혔었다. 그후에도 카프카의 작품들은 꽤나 보았고 특히나 단편들은 꽤나 반복적으로, 다양한 판본으로 읽었지만은 ≪변신≫은 카프카의 첫 만남 이후 처음이다. 조금 더 친밀해진 상태로, 이제는 빅팬이 된 정신으로 다시 읽는 ≪변신≫은 더이상 우화가 아니었다.
신벌에 압살되지 않으려고, 오히려 신에 대한 반항을 통해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려고 기를 쓴 카프카 자신이 그 작품에 녹아 있었다. 일을 하고 들어온 고된 몸으로 가족에 대한 부담으로 애쓴 맘으로 저녁부터 늦은 시간까지 이 글에 스스로를 녹여낸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변신≫의 첫 회독부터 이번 다시 읽기에서까지 숨 막히는 힘겨움을 느꼈던 이유는 나 또한 '읽음으로써' 나를 이야기에 투사하고 작가의 짐을 강제로 어깨에 지려고 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소통의 부재와 극심한 정지 상태가 실제로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든다는 것(변신 1)을 알고 있었다. 본인의 삶이 그러했던 것일까?
동시에, 상황이 바뀜으로 같은 인간 사이에서의 관계가 변신하기도(변신 2), 인간 사이 관계가 바뀜으로 상황 자체가 변형되기도(변신 3)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외부와의 소통이 끊긴, 자기 안에서의 피어오르는 활동이 멈춘 비인간적인 인간은 과연 인간이 맞는 것일까? 탐독하고 감상하며 잠을 아껴 창작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 물음을 이야기로 풀어낸 건 아닐까?
새롭게 읽은 판본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새움출판사의 신간 ≪변신≫에서는 이 작품에 관한 카프카의 개인적인 편지 형태의 글까지 읽어볼 수 있다. 친구의 집에서 만나 5년 간의 열애 중에 2번의 약혼과 파혼을 하고 5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은 펠리체 바우어와의 열애편지(?)와 ≪변신≫을 출간해줄 출판업자 쿠르트 볼프에게 보내는 표지 삽화에 관한 의견을 담은 편지(지금으로 따지면 표지 디자인 논의 메일...)가 바로 그것이다.
펠리체 바우어에게는 창작의 고통을 솔직하면서도 멋들어지게 뽐내며 애정을 듬뿍 드러내고, 쿠르트 볼프에게는 삽화 방향성에 대해 저자로서 니즈를 명확하게 어필한다. 무언가 신보나 신작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유튜브 메이킹 영상으로 훔쳐보는 느낌에 그 시절의 카프카에게 친밀함을 느낀다.
'원전의 문장을 그대로 살려낸 정본 번역'을 콘셉트로 내세우는 만큼, 말미에 이 책의 번역에 관한 역자의 말을 덧붙인 점도 좋았다. 또한, 번역에 공을 들인 만큼 교정교열 및 편집에도 애정을 쏟았으리라 느껴졌다. ≪변신≫ 이외 편지 글들에는 번역 후 편집이 여러 회차 들어가지 않은 듯했지만,, ≪변신≫은 분명 다른 판본들보다 확실히 매끄럽게 읽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과 번역 및 편집이라는 내부적 요소가 아닌 책이라는 물성을 이루는 외부적인 요소. 카프카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표지 이미지 자체는 좋았지만, 표지에 표지에 쓰기에는 얇은 용지를 쓴 데다가 날개도 없어서 고전문학답지 않게 책자스럽다. 특히나 ≪변신≫은 분량도 적어서 들고 다니면서 한 차례 읽고 나니 이미 형태가 무너졌다. 앞표지는 완전히 휘었다. 무거운 책들로 책탑을 세워 한동안 눌러놔야 했다.
다음은 첫 회독 때 읽은 판본. 내가 얼마나 다시 읽어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