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합니다

조금씩 천천히, 함께 익어가는 일

by 이점록

소리 없이 다가온 불청객


반백 살 무렵이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새치가 하나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거울 속 낯선 모습에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구나" 하며 혼잣말을 읊조리던 날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새치는 더 이상 새치라 불리지 않고 '흰머리'라는 정직한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세월은 늘 그렇게 기척도 없이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염색을 하는 게 좋겠다는 아내의 권유가 시작이었다. 처음 미장원에서 염모제를 머리에 바를 때는 이질감이 상당했다. 낯선 이의 손길과 자극적인 향취가 불편해 얼른 자리를 뜨고만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아내가 직접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염색은 단순한 외모 관리가 아닌, 우리 부부만의 오붓한 '의식'이 되었다.


행복한 염색, 행복한 나이듦


퇴직을 한 지금까지도 그 의식은 이어지고 있다. 두 달에 한 번, 아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염모제를 바른다. 나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아내는 내 머리칼을 매만지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건넨다. 훌쩍 큰 아이들 소식부터 오늘 하루 있었던 작은 소동까지.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흐르는 정적조차 염색의 일부가 되어 부드럽게 스며든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각자의 선택이 극명하게 갈린다. 여전히 짙은 흑발을 고수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눈부신 백발을 훈장처럼 드러낸 친구도 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세월을 맞이할 뿐이다. 내가 여전히 염색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솔직하다. 다행히 아직은 가려낼 머리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화학 성분에 대한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1년에 6회 이상 염색하면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뉴스를 접한 뒤로는, 염색 주기를 서너 달 정도로 조금씩 늘려보기로 했다.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무엇보다 젊음을 억지로 붙잡기 위해 무리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저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나이 들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의 세월을 감당해준다는 것


염색을 마칠 때마다 아내에게 말로 다 못 할 고마움을 느낀다. 누군가의 흰머리를 오롯이 마주하고 감당해준다는 건 생각보다 큰 사랑과 배려다. 내 머리 위에 겹겹이 쌓인 세월을 아내는 말없이 함께 받아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더 이상 세월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흰머리가 늘어난다고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고, 염색을 한다고 해서 진짜 청춘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냈고, 곁에는 나를 세심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 이만하면 충분히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거울 앞에서 불쑥 나타난 흰머리에 잠시 멈칫한 분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것은 당신이 그만큼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조용한 훈장이라고. 그리고 그 세월을 말없이 받아들이며 곁에서 함께 염색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속도와 빛깔로 아름답게 나이 든다.


#인생2막 #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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