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머무는 사람에 대하여
조용한 배려, 마음의 경계를 녹이다
2월의 첫눈이 내린 날이었다.
창밖으로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며 반가움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종종걸음으로 버텨내야 할 고단한 하루가 먼저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대문을 나섰을 때 마주한 풍경은 뜻밖에도 말끔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닐 텐데, 이웃들이 각자의 집 앞을 부지런히 치워두고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움직인 보이지 않는 손길들. 그 정성은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조용한 온기를 남기고 있었다. 덕분에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고, 팽팽하게 당겨졌던 마음의 경계도 눈 녹듯 스르르 풀어졌다.
뚝배기보다 진한 사랑의 온도
기분 좋은 여운을 안고 우리 가족은 외식을 나섰다. 발길이 향한 곳은 지난날 아내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던 수지구 동천동의 한 식당이었다. 좋은 기억의 결을 따라 이번에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였다. 점심시간을 살짝 비껴간 덕분에 식당 안은 고즈넉하고 여유로웠다.
창가 자리 너머로 펼쳐진 동천동의 설경은 그 자체로 따스한 위로였다. 정갈하게 차려진 상차림은 눈으로 즐기던 풍경을 입안의 온기로 고스란히 이어주었다. 맛깔스러운 반찬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던 중, 유독 시선이 머무는 테이블이 있었다. 연로한 어머니와 중년의 아들이었다.
할머니는 식사 내내 수줍은 소녀처럼 환하게 웃고 계셨다. 요란한 대화는 없었지만, 그 웃음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세월의 깊이와 애틋함이 전해졌다. 아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숟가락을 옮겼고,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눈빛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존경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짙게 배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 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팔을 부축했다. 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소천하신 어머니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다. 나 역시 저렇게 다정하게 어머니의 팔을 잡고 걷던 계절이 있었을까. 생각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 마음을 한참이나 붙잡았다.
완성된 하루, 고마운 마음의 무늬
그날의 외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었다. 뚝배기에 담긴 정직한 온기, 창가에 머문 겨울 풍경, 그리고 옆 테이블 모자가 보여준 평범하지만 위대한 사랑. 그 조각들이 모여 나의 하루를 고요하게 완성해주었다.
집 앞 눈을 치우던 이웃의 마음과 어머니의 웃음을 지켜주던 아들의 마음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리라. 누군가의 하루를 덜 미끄럽게 만들고, 누군가의 시간을 조금 더 천천히 흘러가게 하는 배려. 식당 문을 나서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없이 길을 터주고, 서두르지 않으며, 곁에 기꺼이 머물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어떤 날의 식사는 마음의 온도를 재는 시간이 된다. 눈 치운 길 위에서 만난 배려와 옆 테이블에서 마주한 사랑 덕분에, 나는 오늘을 조금 덜 서두르며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런 풍경을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이 내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날 오후 유난히 고마웠다.
#공감에세이; #2월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