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이기는 법에 대하여

인생의 겨울... 뭇국 한 그릇에서 건져 올린 지혜

by 이점록

뭇국에 담긴 아침의 온도


오늘 아침, 아내가 소고기뭇국을 내어놓았다. 정갈한 상차림이다. 맑은 국물 사이로 맛있게 익은 무와 소고기가 소복하다. 숟가락을 든다. 국물 한 모금이 입안에 퍼진다. 먼저 속이 풀리고, 이내 마음이 풀린다. 따뜻함은 늘 이토록 빠르다. 몸보다 기억을 먼저 데운다. 몇 숟가락을 넘기다 멈춘다. 문득, 오래된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시린 겨울마다 나를 깨우던, 엄마의 뭇국이다.


“국물이 시원하네. 오늘따라 더 깊은데?”

“겨울 무가 맛있잖아요. 많이 들어요.”

나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 놓는다.

“어릴 적 겨울만 되면 엄마가 꼭 뭇국을 끓여주셨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인다.

"추운데... '뜨슨 맛'으로 먹어라. 그래야 속이 든든하다...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뜨슨 맛이 사람 마음을 풀어주나 봐요."

그 말이 조용히 내려안는다. 짧은 대화였는데 가습 한쪽이 저릿하다.

그래, 겨울을 이겨내려면 차가운 생각보다 따뜻한 속이 먼저였지.

어머니는 그걸 말이 아닌 삶으로 익혀내셨구나.


겨울 풍경을 그리며


내가 자라던 시절의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매서웠다. 난방은 넉넉하지 않았고,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은 일상이었다. 그래도 집안에만 웅크리고 지내지는 않았다.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타고, 손등이 터져라 구슬치기를 했다.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며 겨울을 온몸으로 건넜다.


그 시절 어머니는 요리에 별다른 레시피가 없으셨다. 하지만 손끝만 거치면 투박한 재료도 최고의 맛이 되었다. 특히 겨울이면 뭇국을 자주 끓이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한쪽 냄비에는 무를 채 썬 무가 달큰한 향을 내뿜으며 익어갔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과 국이 들어오면 비로소 우리 가족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밥상 위엔 짠지와 깻잎장아찌가 전부였지만, 그 소박한 차림은 늘 모자람 없이 든든했다. 우리가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서두르면 어머니는 나직이 말씀하셨다.

"뜨슨 맛으로 먹어라. 그래야 속이 든든하다."


어린 마음엔 그저 빨리 먹으라는 잔소리 같았다. 이제야 그 깊은 뜻이 가슴에 와닿는다. 모진 겨울을 이겨내려면 차가운 머리보다 따뜻한 속이 먼저여애 한다, 어머니가 몸소 익히신 삶의 지혜였다.


다시 '뜨슨 맛'으로


지금 나는 따뜻한 집에서 아내가 끓여준 소고기뭇국을 먹는다. 부족함 없는 식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자꾸만 그 시절의 겨울이 겹쳐진다. 단순히 맛이 비슷해서는 아닐 것이다. 국그릇에 담긴 정성과 가족을 향한 온기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뭇국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뜨슨 맛으로 먹어라"던 그 말은 내 안에서 식지 않았다. 삶이 시릴수록 마음을 먼저 데우라는, 사람 사이의 온기를 놓치지 말라는 조용한 당부로 남아있다.


이제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마주하는 아이들을 본다. 아이들 역시 언젠가 저마다의 겨울을 만날 것이다. 그때, 엄마가 차려준 이 따뜻한 국 한 그릇이 떠오르면 좋겠다. 말없이 속을 덥혀주던 기억 하나쯤은 평생을 견디게 하니까.


오늘 아침의 뭇국은 한 끼 식사가 아니었다. 모진 계절을 건너게 한 어머니의 마음이었으며, 다시 이어지는 사랑의 약속이었다.


#추억의음식 #소고기뭇국 #겨울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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