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에서 학교운영위원장으로... 나의 '쓸모'를 새로 쓰다
3월의 학교는 새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아이들은 한 학년씩 몸집을 키워 교실을 옮기고, 선생님들도 새로운 보직 앞에 설렘과 긴장을 얹는다. 이 생동감 넘치는 계절의 길목에서, 나는 뜻밖의 선물 하나를 받았다. 투명한 유리 패 속에 지난 3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감사패'였다.
▲인공지능을 활용, 인생 2막의 쓸모를 그렸다. ⓒ 이점록
나는 인생 2막 4년 차에 접어든 소위 '액티브 시니어'다. 33년 동안 제복을 입고 경찰 공무원으로 살아왔다. 퇴직 전까지는 막연히 생각했다. 은퇴만 하면 비로소 '쉬는 삶'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과로는 피로가 아니라, 내가 여전히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분주함에 가까웠다.
퇴직은 '속도를 줄이는 시간'이 아니라 '역할을 바꾸는 시간'
우리는 오랫동안 퇴직 이후의 삶을 '속도를 늦추는 시간'이라 배워왔다. 책임도 역할도 내려놓고 오직 개인의 여유를 누리는 시기라고 말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활기차게 노년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을 내려놓는 대신 '역할'을 바꾼 사람들이다.
통계청 자료를 봐도 60대 이상의 사회참여 활동은 꾸준히 늘고 있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역할을 스스로 재설계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몸을 실었다.
계급장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낮은 자리'였다. 주민자치센터, 학교운영위원회... 공직 시절 쌓아 온 경험을 밑거름 삼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누군가는 묻는다. "퇴직하고까지 뭘 그렇게 바쁘게 사느냐"고. 하지만 제복 뒤에 가려져 있던 '이웃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쁨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특히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보낸 지난 3년은 내 인생 2막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급식 하나를 살피고, 학교 안전을 논의하며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치안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를 가꾸는 정원사가 되어 있었다.
33년 공직 생활,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학교 정책이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흐르도록 돕고, 지역의 숨결이 살아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거창한 원칙은 없었다. 다만 매 순간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택인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 작은 기준들이 쌓여 학교는 '가고 싶은 곳', '보내고 싶은 곳'으로 자리매김 해갔다.
사실 처음 위원장을 맡았을 때는 그저 내가 가진 행정 경험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순간 예상치 못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33년 공직 생활 동안 수많은 상장과 표창을 받았지만, 오늘만큼 목이 메어 축사를 제대로 잇지 못한 적이 있었던가.
"3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위원장님!
우리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인도해 주심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교장 선생님의 따뜻한 한마디에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계급장을 떼고 만난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 등굣길 안전을 살피던 서늘한 아침 공기, 위원들과 머리를 맞댔던 회의실의 열기까지. 누군가에게 존경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진심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오롯이 닿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인생 2막, '쉬는 시간'이 아닌 '새로운 쓸모'를 찾는 시간
이 감사패는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다. 인생 1막의 관성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선택과 태도로 만들어낸 '인생 2막의 첫 성적표'다. 교문을 나서는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맑게 들렸다. 그 소리가 내 삶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또 다른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한다. 이제 나에게 중요한 것은 화려한 직함이 아니다. '내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퇴직 이후의 삶이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라, 나의 '쓸모'를 새롭게 정의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남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인생 2막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자유와 기쁨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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