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삶, 결국 누군가에게 닿는다

by 이점록

기회의 신은 '태도'라는 얼굴로 찾아온다


지난 2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기록의 쓸모를 고민하며 일상을 채워가던 중, 생각지 못한 연락 한 통을 받았다. <오마이뉴스> 알림창에 뜬 낯선 메시지. EBS 프로그램을 만드는 한 작가로부터 온 뜻밖의 섭외 요청이었다. 은퇴 후 ‘액티브 시니어’로서 시민기자와 작가의 삶을 병행하며 매일의 기록을 일구어 온 시간이 누군가의 시선에 닿은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점록 선생님. EBS 다큐 작가입니다."
선생님께서 시민 기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은퇴를 끝이 아니라, 다시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으로 꾸려가시는 모습이 많은 분들에게 깊은 공감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 (이하 중략)-


정중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며 묘한 설렘과 책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내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모델'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뛰게 했다. 이어진 통화에서 작가는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현역의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나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33년 공직 생활의 마침표가 끝이 아닌, 새로운 기록의 시작점이었다는 확신이 비로소 또렸해졌다.


머릿속이 하얘진 '세 가지 질문'


다큐멘터리의 취지는 분명했다. 노후를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구체적인 설계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보자는 것. 전문가들과 함께 은퇴 이후의 삶을 점검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며칠간 전화 인터뷰가 이어졌고, 프로그램의 방향과 나의 삶의 궤적에 대한 공유도 마쳤다. 이제 촬영 결정만 남겨 두고 있었다.


60대에 처음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제안을 '기회의 신이 내민 손'이라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손을 잡기 전, 몇 가지 질문이 나의 평온하던 호수에 파문이 일었다.


작가 : "선생님, 몇 살까지 사실 것 같으세요?"

: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그래도 100세 시대라고 그러니 90까지 살겠죠."

작가 : "그럼 그때까지 대략 얼마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셨나요?"

순간 사고 회로가 정지된 듯 정적이 흐르더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 "그거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작가 : "퇴직 후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 "성격 탓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깊게 걱정해 보지 않았습니다."


겨우 내뱉은 대답은 낯설 만큼 떨리고 작았다. 90세라는 숫자는 축복일지 모르나, 그 뒤에 숨은 '9,125일'이라는 구체적인 생존의 무게를 단 한 번도 숫자로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긴 항해를 떠나는 배의 선장이면서, 정작 연료 게이지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망망대해로 나선 무모한 선장이었던 셈이다.


출연을 두고 아내와 깊이 상의를 했다. 우리 삶의 내밀한 부분이 방송으로 드러나는 지점에서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스튜디오 촬영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이야기는 멈추게 되었다.


방송은 무산됐지만 질문은 남았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기회의 신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방송 출연보다 훨씬 더 값진 태도가 남았다.


그날 이후 분명해진 것이 있다. 노후 준비는 단순히 통장 잔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애 설계'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무엇을 배우며, 누구와 시간을 나누고, 어떤 태도로 하루를 살아갈 것인가. 결국 답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었다.


60대 인턴, 배움의 운동화 끈을 매다


나는 요즘 스스로를 ‘60대 인턴’이라고 부른다. 인턴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다. 실수하며 배우고, 모르는 것을 묻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제 나는 노후 자금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동시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배움의 즐거움, 기록의 가치를 내 인생 자산 목록의 가장 앞자리에 올려두었다.


동료 은퇴자 여러분, 여러분의 ‘노후 계산기’는 안녕하신가요? 혹시 나처럼 어떤 질문 앞에서 머리가 ‘쿵’ 하고 멈춘 경험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축하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충격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방송 출연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나의 일상은 오히려 한층 또렷해졌다. 기사를 쓰며 세상을 배우고, 이웃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하루하루가 이제 막 제 속도를 찾아가고 있다. 노후는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채워가는 시간이다.


오늘도 나는 ‘배움’이라는 이름의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는다. 그리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당신의 하루에서 가장 소중했던 장면은 무엇이었는가.’ 그 장면을 단 한 줄이라도 남겨보는 일. 어쩌면 그 기록이 당신의 삶에 찾아올 다음 기회를 부르는 가장 정직한 이정표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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