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네 번째 봄, 페인트 작업하며 깨달은 것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이틀간 쏟아낸 땀

by 이점록

퇴직 후 맞이한 네 번째 봄. 눈부시게 쏟아지는 화창한 햇살이 역설적으로 내 마음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멍하니 시선이 머문 곳은 마당의 데크였다. 33년 공직의 무게를 내려 놓던 날만 해도 단단하고 매끄러웠던 나무판들이, 어느덧 햇빛에 색이 바래고 비바람에 살점이 깎이고 갈라져 있었다.


자연스러운 풍화라기엔 너무도 적나라한 균열. 그 모습이 마치 애써 외면해온 내 마음의 민낯 같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속절 없이 바래버린 그 거친 결 속에서, 돌보지 못한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동안 바라만 보던 나는 결국 결심했다.


"그래 올봄에는 손을 대자."

오래 묵혀 둔 페인트 붓을 꺼내 들며, 내 삶의 한 조각도 함께 다시 칠해보기로 했다.


정직한 노동이 건네는 위로

IE003599518_STD.jpg ▲햇살을 머금고 다시 살아난 마당 데크. 붓질 끝에 얻은 작은 변화 ⓒ 이점록


페인트 작업은 단순히 색을 입히는 일이 아니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씻어내고 물기가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려, 조심스레 초록색 스테인을 밀어 넣었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며 한 줄 한 줄 채워나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그러나 붓 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초록빛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무언의 격려를 건네왔다.


땀방울이 이마를 적실 때 쯤, 아내가 내어온 차 한 잔과 다정한 말 한마디는 노동의 피로를 씻어주는 일상의 온기였다. 뻐근한 육신과는 반대로 마음은 점점 환해졌다. 낡은 것을 버리는 대신, 손때 묻은 가치를 다시 쓰다듬고 살려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퇴직 후 내가 배우는 가장 값진 '근테크'였다.


60대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세월의 흔적이 쌓였다고 해서 빛을 잃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 다시 색을 입히면 삶은 언제든 새로운 무대로 거듭날 수 있다는 확신이 차올랐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는 다시 칠해야 할 '어딘가'가 있는지 모른다.


돌보는 마음이 곧 다시 시작하는 용기


작업을 마친 오후, 햇살이 내려앉은 데크는 눈부신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위에는 단순히 페인트만 칠해진 것이 아니었다. 꼬박 이틀간 쏟아낸 땀과 시간,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의지가 촘촘히 스며 있었다. 시원한 차 한 잔을 들이키며 깨달았다. 진정 부끄러운 것은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낡아가는 처지를 비관하며 돌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퇴직 4년 차의 봄, 나는 이제 안다. 삶은 낡았다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매만지고 돌보며 가꾸어가는 정원이라는 사실을. 거친 세월의 흔적 위에 초록빛 희망을 덧칠한 오늘,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으로 다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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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2막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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