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산다고 믿었던 나에게 온 작은 경고
인생 제2막을 살아가며 내가 가장 공을 들이는 가치는 단연 '여유'다. 33년 공직 생활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이제는 천천히 걷는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왔다. 바쁘게 앞 만 보며 달려온 시간에 대한 작은 보상처럼, 느림의 미덕을 배우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뜻밖의 순간, 나는 나 자신의 '속도'를 지적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마음의 속도는 여전히 내 의지보다 한 발 앞서 달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며칠 전 방문한 자동차 서비스 센터에서였다. 대기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정비사 한 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고객님, 혹시 평소 운전 습관이 조금 급하신 편인가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어넘겼다.
"그럴리가요. 저는 평소에도 법규 잘 지키고 꽤 점잖게 운전하는 편입니다."
그러자 정비사는 난감한 듯 미소를 지으며 타이어를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앞 타이어가 눈에 띄게 닳았습니다. 주행 거리에 비해 이 정도 마모라면, 급가속이나 급제동이 잦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처럼 다가왔다. 타이어는 흔히 사람의 몸으로 치면 '발바닥'에 비유 된다. 온몸의 무게를 묵묵히 지탱하며 길을 걷게 해주는 발바닥처럼, 타이어 역시 자동차의 안전을 떠받치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다.
그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타이어의 마모는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나의 운전 습관, 더 나아가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록이라는 사실을. 머쓱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가 한마디를 보탰다.
"거 봐요. 내가 천천히 운전하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당신만 모르는 습관이 있다니까요."
그 말에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니, 나는 여유롭게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속도를 높였고, 신호가 바뀌기 전이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차를 상하게 하는 급출발과 급제동처럼, 내 마음 역시 늘 무언가에 쫓기듯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속도를 줄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타이어의 마모는 내가 살아온 속도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속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조급했다. 마음이 앞서면 말이 거칠어지고, 판단을 서두르면 삶의 균형은 쉽게 흔들린다. 인생 제2막에 들어선 지금, 더 빨리 가는 삶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타이어는 교체하면 되지만, 삶의 균열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타이어보다 먼저 내 마음의 마모 상태를 점검하려 한다. 급하게 밟던 페달을 늦추고, 서둘러 지나치던 순간을 한 박자 쉬어가는 일.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여유'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신호를 재촉하지 않았고, 앞 차와의 거리도 넉넉히 두었다. 그랬더니 익숙했던 길 위의 풍경이 낯설 만큼 또렷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인생은 속도를 줄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로 채워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타이어가 아니라, 내 마음이 먼저 닳지 않도록, 나는 이제부터 속도를 조절하며 살아가려 한다.
#인생2막 #자동차 #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