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숙하게 들어갔던, 겨울맞이가 한창이던 시장.
아돔풀 시장 - 월요일 그리고 금요일.
최근 시장에 가면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빤잎이 가득한 입구를 지나 조금만 더 들어가면
우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씨익 웃어주는 꼴라 아저씨가 있다.
아저씨 앞에 쭈그려 앉아 오늘의 가격에 따라, 보통 60tk 바나나를 한 덩이 사고
덤으로 한 개를 받고 야금야금 먹으면서 일어선다.
몇 걸음 더 걸어가면 달걀판과 달걀 바구니를 앞에 두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에게 닭 달걀을 살지 오리 달걀을 살지 선택해서 4개를 골라 35tk에 산다.
직전에 샀던 바나나 중 두 개를 똑 떼서 한 명에 하나씩 쥐어주고 일어난다.
돌아나오는 길.
지나치기에는 싱글벙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과자 아저씨가 있다.
새로 나온 과자를 맛보고 그 날의 입맛에 따라 하나를 골라 10tk를 건네고 나온다.
하루의 장보기 끝.
10tk가 150원 정도 하니, 나는 보통 1500원어치 장을 보고 나오는 것.
겨울이 다가오면서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어서 시장에서 보내는 시간도 짧아졌다.
그러던 저번 금요일. 아주 오랜만에.
일찍 도착해서 시장 저 깊숙한 곳까지 구경을 갔다.
시장의 입구에는 오밀조밀한 채소 아저씨들이 몰려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이파리 채소가 없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런데 요즘, 점점 푸릇푸릇해지고 있다.
정확한 이름도 알지 못하는데, 상추랑 비슷해 보이는 모습에 괜스레 반가웠다.
내 인생, 채소를 보면서 반가워할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사진 속 하얀 빛깔을 뽐내는 녀석은 무다.
이제 나에게는 저렇게 생긴 친구가 '무'라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삐쩍 마른 녀석이.
한국에 가면 거대한 무의 크기에 압도당하지 않을까.
무만이 아니다. 하나 비밀을 공유하자면, 이 곳은 양파도 마늘도 다들 조그맣다.
마늘은 우리나라 밤 크기에 양파는 우리나라 마늘 크기.
아기자기해서 귀여울 수 있지만 요리하다 보면 인건비도 안 나오는 결과물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그윽하면서도 코를 찌르는 이 이파리의 향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믿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가득하게 쌓여있는 게 고수라는 걸.
나는 고수의 강한 향과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에 처음 왔을 때 참 다행이었다. 이 곳 음식에 고수 맛이 없어서.
그런데 요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고수가 철인가 보다.
어딜 가나 고수가 가득 보이고 오피스 부엌에도 고수 이파리가 빼꼼 빼꼼 보이기 시작했다.
보기엔 예쁜데 먹기엔 별로다 이 녀석들은.
이 가벼운 이파리도 열심히 저울질을 해서 팔고 있는 소년의 손 주먹이
내가 여러 번을 왔다 갔다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사가 잘 되는 듯 매번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동물 시장도 한 자리 가득 차지하고 있다.
쭈그려 앉은 아저씨들 앞에 나란히 나란히 곱게도 앉아있는 닭들.
방글라 닭들이 유독 얌전한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양쪽 다리가 줄에 꽁꽁 매여 있어서 움직이지 못 하는 것뿐.
저 뒤에 아저씨가 온 팔에 힘줄을 세워가며 들어 올린 닭들은
마지막 발악을 위해 파닥파닥 온 날개를 휘저어대고 있었다.
팔려간 닭들은 저 모습 그대로 거꾸로 들려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분명 피가 머리로 쏠려서 어지러움에 시달릴 것이다.
닭뿐만 아니라 소와 버펄로도 한 곳에 시장을 형성한다.
여기에서는 끌고 가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의 씨름을 자주 볼 수 있다.
닭이야 들고 가면 그만이지만. 얘네는 그럴 수가 없다.
결국에는 막대기를 동원하거나 덤벼드는 사람 수가 늘어나면서 끌고 가려는 자의 승리로 끝나지만
버티려는 자의 노력 속에는 지 새끼 혹은 어미와의 이별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이 들어있어
떠나고 난 자리에 그 간절함이 짙게 남아있기도 한다.
덩치만 컸지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은 사진 속 버펄로도
네 발로 굳게 버티고 서서 자신의 간절함을 눈빛 가득 보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이렇게 깊숙하게 시장 속으로 들어왔던 이유는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염소를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그러던 중 이 아저씨와 염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떠나보내기 전 마지막 먹이를 주는 아저씨.
살짝살짝 쓰다듬는 왼손과 먹이를 주는 오른손이 한 데 모여 염소에게 마지막 정을 뿜어주고 있었다.
이게 뭐가 특별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재산의 일부인 염소이기에 무표정으로 줄을 끌고 와 파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서 더욱이 나에게는 아저씨 왼손의 위치와 따스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었다.
염소는 아저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는지, 자기가 팔려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야금야금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었다.
염소 시장에 어슬렁어슬렁 오래도 있었다.
나도 한 마리를 속으로 되새기면서 간절히 바라보던 중 보게 된 이 염소.
얼핏 봐도 새로운 주인의 손에 끈이 잡혀 끌려가는 것 같은.
낯설음이라는 건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참 힘든 건가 보다.
목이 꽉 조여서 질질 끌려가는 뒷모습이
엉덩이를 쭉 빼고 버티려는 뒷모습이
한 발짝이라도 덜 움직이려는 뒷모습이
앞 아저씨의 가벼운 발걸음과는 꽤나 대조되는 모습이다.
물고기 가판대.
그냥 비닐 위에 아무 냉장 방식 없이 햇볕 아래 일광욕 중인 물고기들.
가끔 물고기들 위로 손을 톡톡 털어 뿌려주는 물이 전부.
계속해서 달려드는 파리들의 습격.
처음에 저 물고기 가판대를 봤을 때는 답답함이 먼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물기에 빛나는 물고기의 등판과 아직은 초롱한 눈알을 보면서
음 그래도 싱싱하군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주기적으로 돈을 만지고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의 손이 물고기에 닿아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저씨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저 도로록 도로록 돈 서랍은 참으로 귀엽지 아니한가.
이 동네 아이들은 셔츠를 참 잘 입는다.
평범한 반팔티나 긴팔티는 잘 입지 않는다.
나는 단추를 하나하나 잠구는 게 귀찮은 데 이 동네 아이들에겐 멋인 건지.
그래서 시장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옷 장사 구역에도
옷걸이 빼곡하게 티 보다는 셔츠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추운 날씨가 다가오고 있다.
간간이 긴팔이 보이는 것을 보니 여기도 겨울나기를 준비하나 보다.
방글라데시는 동남아에 있으니까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어.
라는 내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요즘은 격동을 치면서 변하려는 날씨 때문에 일교차가 10도를 넘나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침 저녁에는 추워서 옷을 돌돌 껴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시장에 펼쳐진 옷들도 날씨를 담아 두터워지고 있다.
절대 이 나라에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기모 바지, 스웨터, 내복 바지가 터덥터덥 쌓여있는 모습을 보니
이 곳 겨울나기도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긴장을 하게 된다.
겨울이다. 방글라데시에도 겨울이 성큼성큼 찾아오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역시 이슬람 국가이다.
시장의 한 쪽에 기도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장을 보다가 아잔이 울리면 사람들은 오밀조밀 이 곳으로 모인다.
장사를 하던 분들마저도 아이에게 장을 맡기고 잠시 떠나가는 곳.
갑자기 사람들이 훅 줄어들었다 싶으면 아 다들 기도하러 갔구나 한다.
나는 이 시장바닥의 몇 명 없는 여자 중의 한 명이니까 그 순간 텅 빈 거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여자는 들어갈 수 없는, 그래서 나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곳이지만
항상 이 주변은 아잔이 울리고 난 후면 분위기가 한 층 무거워진다.
금녀의 구역인지라, 테이블 위의 마이크와 돈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돌아나오는 길 꼭 들렀다 오게 된다는 과자 가게가 이 집이다.
아저씨가 참 장사를 잘하셔서, 우리가 아는 척 하기도 전에 먼저 아는 척을 하고 반겨주신다.
아저씨가 파는 과자들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옛날 과자'
설탕물에 첨벙첨벙 목욕을 시키고 굳혀 만든 듯한 설탕 맛 과자.
돌돌돌돌 기름에 볶아 훅 하고 건져내서 땅콩과 섞어 만든 듯한 라면땅.
밀가루를 작게 반죽해서 기름에 오도토토 튀겨 내어 만든 듯한 밀가루 과자.
튀밥을 물엿으로 엉기덩기 붙여 만든 듯한 쌀 튀밥 과자.
내 초등학교 입맛을 살려내는 맛에 방글라데시 맛이 첨가되어
매번 시장에 갈 때마다 자연스레 이끌려 한 손에 들고 나오는 가게가 되었다.
이 가게 앞에만 서면 초등학교 때 가방 메고 실내화 가방 들고 불량식품에 100원짜리 동전을 내미는 나로 돌아간 듯한 묘한 즐거움을 느낀다.
라면땅을 가득 쌓아두고 오이와 양파까지 탑탑이.
봐도 봐도 신기한 이 아저씨의 손목 스냅은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플라스틱 통에 삶은 병아리콩 한 숟갈 탁. 라면땅 두 숟갈 탁탁.
기름 쫘아악 뿌려주고 양념 두 어가지 사락사락 넣어주고.
타다다닥 오이 양파 신명 나게 리듬 맞춰 잘라 쏴악 넣어주기.
박자에 따라 둥기다둥기다 통을 흔들어서 섞어주면 준비 끝.
신문지 탈탈 펴서 가격에 맞춰서 양을 조절해서 나눠주면 장사 끝.
사실 이 간식은 매우면서 짜기까지 해서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보는 걸로 눈이 즐거워 절로 배까지 또동해지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확실히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인기 만점이다.
옆에서 신기한 손목 스냅을 구경하는 내내 사람이 끊인 적이 없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흔치 않은 풍경에 마음이 훅 꿰어서 나도 모르게 포근한 마음이 들어 따라 걸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목도리, 패딩 그리고 니트.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부녀 지간에 꼭 잡은 손.
처음이었다.
이 나라에서 부녀가 같이 장을 보고 돌아가는 모습도.
그것도 저렇게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도.
딸내미가 혹시라도 차에 치일까 손 꼭 잡고 뒤로 빼주는 아빠.
두리번두리번 사방팔방 다 확인한 후에야 살짝 미소를 짓고 아이랑 눈을 마주치고 길을 건너갔다.
따뜻하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에 온기가 스며든다.
둘의 다정한 사이가 계속 이어졌으면.
우리 아빠가 보고 싶다.
여기에서 지내는 시간이 일 분 일 초가 아까워서
자꾸 붙잡으려고 안달을 낸다.
집 바닥에 기어 다니는 벌레들이 익숙해지고
천장에 마을을 이루고 있는 실거미들이 익숙해지고
추워서 강제 운동을 하고 나서야 찬물로 후다닥 하는 샤워가 익숙해지고
녹물을 헹궈내기 위해 정수기에 거른 물로 한 번 더 씻는 게 익숙해지고
시멘트 바닥 위 매트리스에서의 잠이 익숙해지고
갑자기 빛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정전이 익숙해지고
적당한 때가 되면 기다리게 되는 아잔 소리가 익숙해지고
방음 하나 안 되는 이 건물의 모든 소음이 익숙해지고
이제야 좀 사람들과 편안하게 소통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야 좀 사람들 집에 스스럼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야 좀 일을 제대로 꾸려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야 좀 이 시골의 매력을 한껏 느껴볼 수 있게 되었는데
3주 후면 떠나야 한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왜 벌써부터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을 키우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냥 행복하다가도 문득 싸해지는 느낌은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