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회진 Jul 17. 2019

펜싱 이야기 #14. 미니멀리즘 펜싱

 몇 해 전부터 미니멀리즘에 관심이 많아 관련된 책과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곤 했다. 그러다 문득 펜싱에도 미니멀리즘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니멀리즘이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만 아주 신중히 고민한 후 구입하고, 구입한 것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생활 방식이다. 미니멀리즘은 요구나 욕망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필요에 따라 충분한 고민과 검토 후 행동을 하는 태도이다.


 많은 아마추어 선수들은 빠른 스텝과 과장된 동작을 통한 페인팅을 동경한다. 중간 거리에서 기습적으로 몸을 흔들어 상대의 거리를 빼앗고, 격돌 직전에 검을 흔들어 상대의 방어 자세를 무너뜨린 다음 가슴 정중앙에 검을 꽂아 넣고 싶어 한다. 완벽하게 상대를 속이는 것에 대한 로망으로 두 번, 세 번, 네 번씩 페인팅을 섞어 넣는다.


 이런 공격은 일단 보기엔 좋다. 작전이 통하면 만족도도 상당히 높다. 이제 펜싱 같은 펜싱을 하는 것 같아 자신감이 차오른다. 이제 초보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하게  펜싱 고수의 길로 들어섰다고 착각하게 된다.


 여기에는 작은 문제가 있다. 그 작전은 그런 기술을 쓰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만 잘 통한다는 것이다. 경험이 많은 선수들에겐 (자신을 악어로 착각하는) 날개를 펼친 목도리도마뱀처럼 보일 뿐이다. 즉, 요란하게 코 앞까지 접근해 점수를 헌납하는 고마운 택배 서비스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두 선수의 실력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면 15점 시합에서 페인팅을 이용한 멋진 공격으로 득점에 성공하는 경우는 끽해야 2, 3점이다. 대부분은 검을 주고받기를 반복하다 조금 더 집중한 쪽이 점수를 가져간다. 멋지게 방어를 하고 깔끔하게 반격을 하는 경우보다 공격자가 성급하게 쫓아 들어가다 방어자의 검에 스스로 찔려 실점하는 경우가 더 많다.


 화려한 페인팅과 복잡한 공격은 좋은 작전이다. 다음 레벨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많이 고민하고 훈련하여 복합 공격의 요령을 터득하고 각자의 콤보를 개발해 나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많이 실수를 하는 것이 찌르기, 즉 피니쉬 동작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무리 멋지게 상대를 속여 내더라도 마지막 찌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점수를 낼 수 없다. 마막에 잘 찌르려면 상대 선수와의 거리와 이동 속도, 검의 각도, 힘의 균형이 잘 맞아야 하는데 화려한 페인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상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검의 위치와 각도도 궤도를 많이 벗어나 있고, 손과 어깨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 버려 원하는 곳을 정확히 찔러내지 못한다. 결정적인 순간 헛손질을 하고 상대에게 점수를 헌납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리고 내가 왜 찌르지 못했는지, 내가 왜 찔렸는지를 본인이 깨닫지 못한다.


 이제 고수들의 펜싱을 살펴보자. 멋지고 화려한 페인팅에 이은 깨끗한 공격을 여러 번 반복 재생해보자. 그리고 나의 시합 영상을 되돌려 보자. 둘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눈에 걸리는 게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점은 있겠지만,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피니쉬 직전에 한 번 더 페인트를 섞어 상대를 완벽하게 제치고 공격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동작을 부풀린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내 공격이 먹히지 않는 것은 내가 완벽하게 상대를 속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동작 사이사이 페인팅을 더 끼워 넣었다. 상대가 어디를 막아야 하는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동작을 부풀렸다. 막히면 하나 더, 또 막히면 또 하나 더. 이런 식으로 계속 동작을 부풀렸다. 공격 하나에 페인트를 5번, 6번씩 넣었고, 그래도 안되면 7번, 8번도 넣었다. 처음엔 잘 통했다. 상대는 적잖이 당황해 방어가 흐트러졌고 나는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15점을 채울 수는 없었다. 일단 내가 먼저 지쳤다. 속도가 꽤 느려졌다. 숨이 너무 차 페인팅 숫자도 하나 씩 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상대는 몇 점 잃는 동안 내 공격의 본질을, 그리고 약점을 눈치챘다. 상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물러나지 않는 상대에게 페인트를 쓸 순 없었다. 나는 치고 들어갔지만 상대는 가만히 있다가 검으로 나를 겨냥했다. 나는 부지런히 뛰어들어가 스스로 상대 검에 가슴을 밀어 넣었다. 다음 포인트도, 그다음 포인트도 그렇게 점수를 빼앗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내가 왜 점수를 잃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정말 눈물이 날 만큼 우습게 실점을 했는데도 나는 계속 동작을 부풀리고 있었다.


 고수들의 시합을 보면 페인팅과 공격 차이가 적다. 페인팅 중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바로 공격한다. 고수들의 페인팅은 공격 그 자체이다. 그들은 화려한 공격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빠르고 깔끔하고 정확한 동작이라 화려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노련한 상대는 소란 맞게 쳐들어오는 상대를 겁내지 않는다. 요란한 불꽃은 열보다 빛을 더 많이 내는 법이다. 모든 불이 똑같이 뜨겁지 않다. 불이라고 해서 다 같은 불이 아니다. 상대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고 싶다면 나의 동작을 꼼꼼히 점검해보자.


 페인팅을 위한 페인팅인지, 공격을 위한 페인팅인지 그 둘을 구분하자. 상대와의 거리에 따라 그 둘을 나눠서 쓰자. 좀 먼 거리에선 페인팅을 위한 페인팅을, 언제든 찌르거나 찔릴 수 있는 거리에선 공격을 위한 페인팅을 쓰자. 그리고 그에 앞서  의미 없는 동작을 모조리 걷어내자. 노련한 선수들은 의미 없어 보이는 동작에도 숨겨둔 의도를 둔다. 나도 모든 동작에 이유를 만들자. 그리고 적절한 상황에 꼭 필요한 동작만 사용하자.


 펜싱은 여러 가지 기술이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기술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은 찌르기로 끝이 난다. 때로는 복잡하게, 때로는 단순하게, 가끔은 허세로 부리고 또 틈틈이 기습도 섞기도 하고 또 가끔씩 동작을 잔뜩 부풀려 압도적인 물량으로 공격을 하자. 가장 좋은 것은 한 시합에 이 모든 것을 다 쓰는 것이다.


 적절한 상황에 꼭 맞는 무기를 꺼내는 것이 승리의 열쇠이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상황에 맞지 않는 불필요한 동작부터 버려야 한다. 상대에 맞는 무기를 잘 정리해 두는 것, 상황에 따른 전술을 미리 확립해 놓는 것, 이것이 바로 미니멀리즘 펜싱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펜싱 이야기 #13. 승리라는 여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