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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Apr 25. 2019

펜싱 이야기 #0. 펜싱하는 남자

검이라는 무기를 쥐게 된 겁쟁이

 펜싱은 참 많은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스포츠이다.


 스타킹과 펜싱 바지를 입고 가슴보호대를 낀다. 릴(전기선)을 손에 쥐고 (전기 신호로 득점 판정을 하기 때문에) 땀냄새가 밴 펜싱복 상의를 입는다. 전기 재킷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두꺼운 장갑을 낀 다음, 검과 전기 재킷과 심판기에 릴에 연결한다. 신발을 고쳐 신고 마스크를 눌러쓰고 나면 비로소 전투 준비가 끝난다.


 피스트(경기장)에 오른 선수는 자신만의 주문을 외운다. 승리를 위해, 겁을 먹지 않기 위해,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는 나름의 짧은 의식을 치른다.


 나의 경우에는 손가락을 장갑 끝까지 밀어 넣고 손을 쥐었다 펴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장갑의 안 쪽 손목 언저리에 써진 'Do Not Hesitate (망설이지 말자.)'라는 나의 다짐을 눈으로 좇는다. 을 길게 내쉬면서 눈을 감고 세 번 주문을 외운다.


 ' 망설이지 말자, 망설이지 말자, 망설이지 말자.'


 눈을 뜨고 왼손으로 마스크를 두어 번 쾅쾅 때린 뒤 시작선으로 걸어가 자세를 낮추고 검을 들어 준비가 끝났음을 심판에게 알린다.


 내가 놓쳤던 수많은 실수들과 패배 앞에는 늘 겁을 집어먹고 우왕좌왕하던 내 모습이 있었다. 37년이란 짧지만은 않은 나의 인생 속 그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늘 안전한 것, 확실한 것만 선택했고 그것은 나를 엉성한 어른으로 자라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나 도전과 경쟁을 회피했고, 불필요한 다툼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내야만 했던 갈등에서까지도 양보와 배려를 가장한 줄행랑을 쳤다.


 대충 써버린 시간만큼 대충 자라 버렸다. 화를 내는 법도, 항의를 하는 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어른들의 무대에 떨어졌다. 어설픈 자의식과 부족한 투지로는 툭 굴러온 작은 이익에나 만족해야만 했고 눈앞에서 무너지듯 던져지는 거대한 손실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닳고 닳은 어른들에게 나는 그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뒷다리를 다친 토끼일 뿐이었다. 지긋지긋했다. 조잡한 공격을 해오는 비겁한 사람들과 눈에 보이는 뻔한 꼼수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나에겐 그것을 받아쳐낼 무기가 없었다. 가끔은 썩 괜찮은 무기를 쥐고 있는 상황도 있었지만 그것을 다룰 실력을 갖추지 못해 패배하거나 포기하거나 도망쳐야만 했다. 약아빠진 인간들보다 그걸 묵묵히 참고 있는 내가 더 싫었다.


 어느덧 펜싱 7년 차에 접어들었다. 보잘것없어 보였던 단 한 번의 승리는 '과연 할 수 있을까'를 '나도 할 수 있구나'로 바꿔놓았다. 해가 쌓일수록 아주 조금씩 실력이 늘었고 승리의 숫자는 한 자리씩 늘어갔다. 자신감은 창가에 둔 방울토마토처럼 어느 틈엔가 빨갛게 영글었다. 도전을 두려워하던 나는 이제 더 강한 상대를 찾아 다른 클럽, 다른 도시로 훈련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하청업체(공장)를 운영하는 나는 하대와 냉소에 짓눌려 가벼운 우울증과 자격지심을 면허증처럼 품고 다녔다. 튀어 올라온 두더지가 뿅망치를 두들겨 맞듯, 튀어서 좋을 게 없는 게 하청의 세계에선 적당히 모자란 척, 적당히 부족한 척 쭈그리고 사는 게 편했다. 그게 십 년 넘게 이어지다 보면 내가 정말 모자란 사람이 아닐까 의구심을 품게 된다. 자신감 상실은 의욕 상실로 이어지고, 결국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런 나에게 펜싱은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운동에서 얻은 자신감은 일로 이어졌다. 펜싱은 죽어 버렸던 의욕이 다시 샘솟도록 하였고 거대한 변화를 감당할 용기를 주었다. 도전은 새로운 기회를 불렀고 생애 처음 외부 투자라는 것을 받고 공장 증축까지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피스트에 오르면 부끄러운 어린 시절이 자주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늘 지고, 늘 당하고만 살았던 초라한 나에게 장갑을 끼워준다. 손을 몇 번 쥐고 펴기를 반복하며 짧은 주문을 외우고 검을 고쳐 쥐고 자세를 잡는다. '알레(Allez)'라는 시작 신호가 떨어지면 상대에게 곧장 달려든다.


 시합이 끝난 후 강렬한 승리의 쾌감이나 분통 터지는 패배의 억울함에 앞서는 나의 감정은 오늘도 피스트에 올랐다는 감격이다. 약한 상대 앞에서 시건방 떨지 않고 강한 상대 앞에서 겁먹지 않으며 크게 빗나간 상대의 칼에 허벅지 어딘가 찢어져 피가 비치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묵묵히 상대의 검을 마주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나에 대한 격려이다.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과 잦은 부상, 몇 달째 이어지는 긴 슬럼프로 인해 가끔씩 확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오늘도 여전한 걸음으로 펜싱클럽으로 향한다. 그곳엔 약한 내가 있었고 제법 괜찮아진 내가 있고, 더욱 강해질 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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