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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borambo Nov 24. 2024

고양이와 고양이

동굴 밖 시간 3

  동생이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구조해 왔다. 방금 전에 태어난 건 지 한 손바닥에 올라왔다. 이렇게나 작은 존재가 빠졌다던 파이프도 그만큼 작은 폭이었고, 땅속에 박혀 있었다. 사람이 지나지 않는 외곽에 깊숙이 박힌 파이프 안. 상상만 해도 무서운 공간, 이제 막 눈만 뜬 새끼 고양이는 폭염 속에서 이틀을 울었다. 가느다란 낚싯줄에 끌어올려진 고양이. 아니, 낚싯줄을 붙잡은 고양이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는 사이가 되어 마주한 이 고양이는, 울고 숨 쉬고  무언가를 먹는 단순한 능력만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구해내는 이틀간의 외침이 이름 모를 영웅의 대서사시를 들은 것처럼 위대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정말 정말 오랜만에, 강인한 생명력을 느꼈다. 감동했다. 두근거렸다.


 그럼에도 처음 이 친구가 집에 왔을 때 엄마와 난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집엔 이미 6년 동안 외동인 채로 기고만장하게 자란 반려견이 있기 때문이었다. 개와 고양이가 앙숙인 것도 만국공통의 상식 중 하나 아닌가. 게다가 고양이는 너무 작고, 외동견 웰시코기는 너무나도 크다. 공룡과 어린아이처럼 체급차이가 심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동생이 입양처를 구하든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치료가 필요했고, 약을 먹이며 유야무야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얼빵하게 두 어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 사이 고양이는 야생에서 체득했던 생존력을 십분 발휘해, 엄마의 핸드백이(집에 있는 내내 안고 있기 때문에) 되었고, 집안에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단순하고 투박한 매력으로 반짝이던 외동견 웰시코기는 벼락처럼 등장한 둘째로 인해 원치 않던 내면의 성장을 시작해야만 했다. 태어나 처음 집에 들인 고양이의 화려한 귀여움에 나 또한 종종 넋을 잃었지만, 아들 같은 웨일스의 귀염둥이를 배신할 수 없으므로 눈으로만 고양이를 쫓아다녔다.


  그렇게 간신배 같은 일상을 보내던 어느 찜통 같은 여름날, 하필이면 검정 옷을 풀 장착 하고 집 밖을 나서는 길이었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혹시 밥솥 뚜껑을 열고 들어온 건가, 착각이 들만큼 뜨거워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5미터도 안 걸었을 것이다. 신기루를 본 듯 믿을 수 없는 대치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 상황이란.. 검은 모피코트를 두르고 지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 누워있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맞닥뜨린 것. 심지어 방금 문을 닫고 나온 집 안에서 이제 막 자기 몸의 가동범위를 테스트하며 활개를 치고 있던 둘째와 꼭 같은 크기의 새끼였다.


 모로 누운 그 아이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다. 반면 난 온몸을 적시는 땀이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도 잊고 놀란 채로 몇 분 가량 서 있었다. 한동안 그 친구가 누워있는 곳이 어떤 경계인 것 마냥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없었다. 우리 집 아이는 집에 있는데 혹시 지금 이 친구가 우리 집 아이와 같은 아이인가, 문을 열고 나오던 틈으로 뛰쳐나와 눕혀진 것인가, 를 털 색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의심했다. 그리곤 불안하고 두려워져, 왜 이 길에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가, 아무도 나와 함께 놀라지 않는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다, 용기를 쥐어짜 다가갔다. 단단하게 죽어있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에 죽음을 겪은 것 같았다. 불현듯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저 친구가 한 번 더 지나가는 차에 같은 일을 당해버린다면 이제부터는 이 일은 영원히 '내 고통'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종종 지각을 일삼는 게으름뱅이가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온 데엔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첫째 멍이와 둘째 양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양손에 비닐장갑을 꼈다. 새 플랫 슈즈가 들어있던 가벼운 종이 상자를 들고 모종삽을 챙겼다.- 이렇게 글로 적으니까 무척이나 담담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애기야 좋은 곳으로 가라 제발 이런 일 당하지 마 제발, 등등의 말을 쉴 새 없이 랩처럼 중얼거렸다.

 박스를 옆에 두고 두 손으로 아이를 잡았다. 지금 당장 내게서 달아나 버린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평범한 고양이를 들어 올린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의지가 사라진 몸이었다. 아스팔트가 평범한 아이를 더 더 더 녹여 버린 것이었다. 아니 죽음이 그랬다.

 박스를 들고 뒷 산으로 향하는 길. 추가된 건 50g도 안 되는 종이 상자인데, 어린 양이의 무게가 들어 올릴 때와 달리 더 무겁게 느껴졌다. 이 무게를 나만이 알고, 이 여름과 공간이 변함없을 것이라는 게 슬프고 무섭게 느껴졌다. 서툴게 땅을 파며 함께 묻어줄 간식 하나 가져오지 못한 게 왠지 미안했다. 등산로 입구까지 단 1초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지나는 일은 없음에도, 여름과 고양이와 나만 세상에 남은 것처럼 이 친구를 묻어주고 돌아올 때까지 그 누구도 마주치지 못한 게 지금도 이상하다. 등산로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다시 이 친구가 누워있던 길을 지나니, 좀 전까지 죽음으로 뜨거웠던 골목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 섭섭하게 느껴졌다. 고양이만 없고, 나는 있고, 고양이만 없고, 뜨거움은 있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 거짓말이고, 막 고양이가 묻힌 곳이 진실인 것만 같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길을 따라 걸어야 했고, 더 깊은 거짓말 속으로 들어갔다.


 수개월이 지난 요즘도 매일 그 아스팔트 길을 지난다. 대게 누워있던 자리는 피하며 여름날의 죽음을 떠올리는데, 어쩌다 그 자리를 밟게 되었을 땐 조심스러운 생각과 물음들이 떠오르고는 한다. 그렇게 여러 날의 궁금증을 모아 집 현관을 열고 들어가며, 달려 나오는 멍이 양이를 본다. 인사를 나눈다. 쓰다듬고 몸을 부비며 촉감으로 너희와 내가 살아있음을 믿는다. 매일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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