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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Nov 20. 2022

매콤달콤 황태김밥

매서운 바람이 빚은 쫄깃한 부드러움을 꿈꾸며

“혹시 공부해요?”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던 C가 나를 굳이 불러서 유례없이 조심성이 묻어나는 질문을 던졌다. 공부할 시간은 줬고? 여기서 기본 나한테 던져준 일에 네가 나한테 떠넘긴 일까지 하려면 임용 공부할 시간이 있겠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니요’라고 짧은 한 마디만 남겼다. 짜증이 나면서도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계속 일을 하느냐 마느냐가 C에겐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으니까. 연말은 여러 모로 중요하다. 다음 1년을 좌우할 많은 것들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동 교과에서 어떻게 시수를 배정하느냐, 학년과 세부 과목을 어떻게 나누는가는 새해 직무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C는 관심도 없던 나의 계획이 궁금해진 것이다. 물론 어떤 변수든 결론은 C는 편하다, 겠지만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내겠다는 그의 열정에 나는 또 한 번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배울 게 참 많은 선배님이시다.


그동안 온갖 잡무를 스리슬쩍 내게 밀어 넣은 C에 쌓인 감정이 많았던 탓에 그가 원하는 답을 쉽게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는 찰나, 잽싸게 말을 낚아채며 넋두리를 시작했다. 요는 내가 가버리면 본인은 어쩌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행복지수 최고를 찍으며 직장 생활을 해온 선배가, 앞으로도 그렇게 쭈욱- 편하게 일할 선배가, 나 없더라도 다른 비정규직을 사골 우리듯 푹푹 우려먹을 선배가, 대체 뭐가 걱정이라는 건지. 정말 끝까지 일관성 있는 캐릭터다. 역시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태도로 대하는 그 모습에 다시금 놀랐고, 마음 깊이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이후에도 C의 연락은 계속 되었다. 수업자료를 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철저한 준비성에 경악했다. 무엇보다 C의 뻔뻔함에 경이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수치심을 선물로 고이 전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년 전에도 내게 같은 말을 했던 그에게 나도 선배님의 자료를 좀 받고 싶다고 했더니 본인은 수업 자료 같은 게 없다고 말했던 게 정녕 기억이 나지 않느냐 말이다. 그러고 교무실 한 구석에서 그가 수업 자료로 썼던 부교재 수십 권 더미를 발견했었다. 그런 주제에 자료를 다 내놓으라니요. 매년 새로 나눠주는 교과서까지 달라고 하니 참 구질구질했다. 난 외치고 싶었다.

"피차 교류도, 정도 없던 사인데 우리 쿨하게 모른 척 하고 지냅시다. 사람은 갑자기 변하면 안 된다고들 하잖아요."


어이없는 마음을 누르며 도시락을 꺼냈다. 김에 매콤 달콤하게 양념한 황태 조림과 밥을 넣고 휘리릭 말아 만든 김밥이었다. 간단하면서도 든든하고, 적당한 매운 맛이 분한 마음을 눌러주는 데 제격이었다. 게다가 평소에는 씹기도 귀찮은 질긴 식감도 이날은 도움이 되었다. 어디에라도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았으니까. 자꾸 씹다보니 거칠게 보였던 표면이 부드럽고 쫄깃하게 느껴졌다. 억세 보이는 결들 사이사이에 스며든 양념의 감칠맛이 미각을 깨웠다. 씹을수록 달짝지근하면서도 알싸한 양념이 베어 나왔다. 이런 질김이라면 계속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겨울 바닷가에서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얼고 녹기를 반복했을 황태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 추위를 견디면서 만들어진 결이 이토록 질긴 부드러움을 만들었으리라. 


어쩌면 내게 이곳은 겨울 바다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계절을 품은 바다 중 겨울 바다를 가장 좋아한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이, 그래서 더 깊고 깨끗하게 빛나는 그 풍경을 좋아한다. 그 아름다운 풍경 한 구석에 자리를 잡기 위해선 매서운 바람을 견뎌야 한다.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애정하는 곳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혹독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야 했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버텨야 했다. 물론 늘 바람이 부는 것만은 아니었다. 놀랍도록 추위가 잠잠해지고 그 위로 따뜻한 볕이 쏟아져 환상의 장면을 선사하는 순간도 있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따스함과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한 광경에 행복했던 적도 꽤 있다. 감히 바라본다. 그 수많은 시간을 지나면서 얼고 녹으면서 좀 더 단단하게 부드러워졌기를. 보드랍지만 질긴 그 결속에 켜켜이 풍부한 맛을 남겨두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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