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막글 발행

클래식은 오늘도 달린다

by 정하다


어른이 된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자동차라고 답할 것 같다. 자동차는 이동 수단일 뿐이라며 떠들어대던 나조차도 도로에서 신차를 보게 되면 눈동자가 한참 머무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신차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7살 좀 넘게 먹은 자동차를 타고 있다. 7년 전 회사 동료를 따라 우연히 BMW 매장에 구경 갔다가 계획에 없던 자동차를 계약하고 돌아왔다. 그전까지 나는 여러 번 차를 바꾸긴 했으나, 모두 필요에 의한 기변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동 수단으로써 자동차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당시 필요에 따라 최소의 비용으로 국산 중고 자동차만을 고집했었다.





첫 차는 자취짐을 쉽게 옮길 요량으로 산 수동 갤로퍼 이노베이션이었다.


앞에 의자 두 개, 뒷자리는 모두 화물칸으로 설계된 차량이었다. 그때 거주지가 불안정한 자취를 할 때라, 이사 때마다 이삿짐 차를 부르느니 짐을 옮길 수 있는 차를 하나 사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차로 옮길 수 있는 만큼만 단출하게 살림살이를 구비하며 살았다. 요새 말로 '미니멀리즘'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게다가 그 차는 소형 화물로 분류되어 있어 자동차 세금도 얼마 안 했고, 당시 경유값도 싸던 시절이라 기름값 부담도 적었다.


거주지가 그나마(?) 안정되고서 차를 바꿨다. 짐 옮기는 효용이 없음에도 그 차를 계속 유지하기에 그 차는 승차감이 너무 안 좋았다. 덜덜거리는 그 차로 두 시간 이상 고속도로를 타면 온몸이 쑤셨다. 요즘은 안마 시트가 장착된 신차들이 많이 나오던데, 그 차만큼 진동이 세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수동 변속기라 차라도 막힐 때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뒷좌석이 없어 사람을 태울 수도 없기도 해서 활용도가 많이 떨어졌다는 판단 하에 기변을 결정했다.





두 번째 차는 LPG 승용차 토스카였다.


덜덜거리는 진동에 질린 터라 정숙하고 편안한 승용을 알아봤는데 휘발유 값이 만만치 않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승용은 꼭 타고 싶었기에 LPG 차량을 선택했다. 그때 LPG 가격은 7-800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휘발유에 비해서 반값 정도 했던 것 같다. LPG 가스통이 트렁크에 있기 때문에 트렁크는 공간이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대신 뒷좌석에 사람도 태울 수 있고, 덜덜거리지도 않으니 내 상황에 딱이다 싶었다. 더욱이 현대, 기아 차가 아닌 GM 대우 차량이라 감가도 엄청났기에 매우 저렴하게 세단의 오너가 될 수 있었다. 비록 LPG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차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 차는 우리 세 식구를 실어 나르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작은 문제 하나는 트렁크 공간이 없어 아이 유모차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디 나갈 때마다 애를 먹었다. 결국 조수석 의자를 최대한 뒤로 밀고 유모차를 죄다 분해해서 조수석에 이래저래 욱여넣긴 했지만 그렇게 하면 아이와 함께 뒷좌석에 앉은 와이프의 공간이 매우 좁아졌다. 와이프는 괜찮다고 했지만 매번 장거리를 오갈 때마다 (당시 지방에 계신 부모님 댁에 주말마다 왔다 갔다 했었다) 힘들어 보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욱여넣는 나도, 좁은 공간에서 장거리를 가야 하는 와이프도 모두 힘들었다. 게다가 둘째까지 생겼다. 더는 이 차와 연을 이어갈 수 없겠다 싶어 이별을 고하고 세 번째 차를 영입했다.





트렁크가 좁아 불편했으니, 아주 넓은 트렁크를 가진 차만을 물색했다. 베라크루즈.


현대에서 작심하고 만든 대형 SUV였다. 이 차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명차라고 불린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만 너무 못생겼다. 게다가 저렴한 차량을 찾다 보니 색깔도 내 나이에 맞지 않는 아주 올드한 회색이었다. 50-60대들이 주로 타는 모양과 색깔.


하지만 트렁크만은 광활할 정도로 넓었다. 유모차 따위는 분해하지 않고 그냥도 쑥쑥 들어갔다. 그러고도 공간이 한참 남았다. 아이가 어릴 땐 이것저것 짐 가방도 많은데 스트레스 전혀 없이 짐을 실을 수 있었다. 못생기고 올드해 보인다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는 차였다. 차가 크고 튼튼해 안정감도 있었다. 어린아이 둘을 태우고 다니는 상황에서 안정성은 중요했다. 단종된 차량이었기에 시세도 저렴해서 매우 싸게 사서 몇 년을 탔다. 주말마다 짐을 잔뜩 싣고,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부모님들을 위해 본가와 처가를 누볐다.


아이들이 자랐다. 더 이상 유모차는 필요가 없어졌다. 이동 시에 짐이 단출해졌다. 그때부터 차의 크기가 부담스러워졌다. 그 넓은 트렁크를 텅 비운 채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대형 SUV라 주차할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편의 기능이 없는 점에 슬슬 불만도 생겼고, 괜히 덩치만 커서 기름값만 많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이 차의 실효성이 사라지니 불만이 자꾸 생겼다.




이 맘 때였다. 회사 동료가 BMW 매장 구경을 가자고 했다. 그가 차를 진짜 구매하기 위해 알아보는 중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차에 꽤 관심이 많았던 친구였기에 가는 동안 BMW 차의 특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연설이 아니더라도 나 또한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 브랜드의 차가 좋다는 것쯤은. 혹시나 나중에 독일 차를 사게 된다면 벤츠, BMW, 아우디 중 나는 BMW를 선택할 것이라고 혼자 상상한 적도 있다.


벤츠의 정숙성이 좋다고는 하나 내 눈엔 좀 올드해 보였고 다들 좋다 하는 그 삼각별도 나로서는 왠지 부담스러웠다. 아우디는 친구 차를 몇 번 타 본 적 있었는데 내 이미지랑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BMW의 스포티함이 좋았다. 그 회사의 엔지니어들이 무게 배분에 병적으로 집착한다는 둥 여러 썰들은 익히 들은 터였다. 기술적으로 잘은 모르지만 그런 썰들은 멋있어 보였다.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차에 동료와 함께 BMW 매장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건 사고 비슷한 사건이 되었다.


매장에 방문해서 전시된 여러 차들에 앉아보고 만져봤다. 솔직히 말하면 이미 나는 매료되어 있었다. 고급스럽고 편한 착좌감, 터치하는 것들의 고급스러운 소재감. 난 이미 흠뻑 젖어있었다.


엄마는 늘 말하셨다. '싼 거 찾지 말고 제대로 된 거 하나 사서 오래 쓰는 게 돈 버는 거다.' 이 말이 이 상황에 썩 잘 붙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기어코 이어 붙였다. 눈이 돌아가니 BMW만 제대로 된 물건이고 나머지 모든 브랜드는 싼 거, 그저 그런 거가 되어 버렸다.


내 흔들거리는 눈빛을 읽었는지 딜러는 이달의 할인 금액에 대해 속삭였다. 역대급 할인이라고 했다. 경차 한 대를 너끈히 살 수 있는 할인 금액은 너무 달콤하게 들렸다. 계약금 20만 원만 걸면 된다고 했다. 취소하면 그대로 돌려준다 했다. 나에게 손해는 없다고 했다. 사실이다. 계약을 하고 간들 취소하면 환불이 될 테고 손해는 없다. 고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차는 비쌌고, 이런 큰 지출을 상의도 계획도 없이 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동료와 매장을 나왔다.


20분쯤 왔을까. 그 차는 계속 눈에 밟혔고 눈앞에 아른거렸다. 동료에게 차를 돌리자고 했다.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계약은 하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그렇게 나는 차를 돌려 매장으로 다시 향했고 딜러가 내민 고급 펜으로 멋들어지게 서명을 갈기고 말았다.




보통은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이런 사고를 고했을 때 난리가 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겁나진 않았다. 반응이 별로면 취소하고 20만 원 계약금을 환불받으면 될 뿐이니까. (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에게 얘기했다. 충동적으로 BMW 매장에서 계약을 했다고. 정가가 얼마인데 얼마 할인해서 얼마에 살 수 있다고. 조건이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 그럼에도 많이 비싼 건 사실이라고.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의외로 아내는 담담했다. 충동적으로 그 큰 소비를 했냐고 타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계약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담백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충동구매 아닐 거라고. 당신은 오래전부터 그 차가 사고 싶었을 거라고. 마음속에 계속 눌러놨던 욕망인데 직접 만져보면서 그게 튀어나온 것일 거라고. 당신은 물건을 살 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절대 충동적이 아니었을 거라고.

그리고 당신은 여태 마음에 차지 않는 중고차만 사지 않았냐고. 디자인이고 기능이고 다 무시하면서 그냥 필요에 의한 차만 타왔으니 한 번쯤은 새 차를 사고 싶었을 테지. 그리고 이왕 사는 새 차니까 좀 더 주더라도 마음에 드는 차를 사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것 같다고. 우리 둘이 좀 더 아껴 모으면 되지.라고 말해줬다.


꿈보다 해몽이었다. 분명 충동적으로 차를 계약하고 와서 "나 사고 쳤어." 한마디 했을 뿐인데 아내는 나를 늘 참다가 이제야 겨우 욕심 하나 꺼내 보인 합리적인 인내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놓았다.


민망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 취소할 수도 있고, 취소와 동시에 계약금은 환불해 준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흔들림 없는 에이스침대 같았다.


"뭘 굳이 취소해. 지금 계약해서 기분 좋잖아? 취소하면 이 기쁨이 다 실망과 아쉬움으로 바뀔 거야. 그러니 계속 이 기분 만끽해. 대신 우리 이 차 평생 타자.ㅎㅎㅎㅎ"


마음이 말도 못 하게 편해졌다. 아내 성격상 극악스럽게 반대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이렇게 미화시키고 포장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첫 새 차 BMW가 우리 또 하나의 가족으로 영입되었다.





이 차를 타게 된 지 7년이 지났다. 그 7년 동안 신형도 나오고 전기차들도 나오고 시장은 끊임없이 진보했다. 그러는 시간 속에서 나는 한눈팔지 않고 이 차를 굉장히 만족스럽게 탔다. 뭐 하나 불만이 없었다. 탈 때마다 감격했고 운전하는 게 재밌었다. 차는 이동 수단일 뿐이며, 모시는 게 아니라는 신념으로 주유소 자동 세차만 돌려대던 나도 이 차만큼은 한 번씩 손세차도 맡기고, 셀프세차도 하면서 나름 정성을 쏟고 아꼈던 것 같다.


가끔 울적함을 핑계 대고 몰래 연차를 내고 지방으로 이 차와 단 둘이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쾌감이 좋았다. 그렇게 차와 정이 들고, 이 차는 나의 가장 멋진 장난감이 되었다.




그런데 이 녀석도 이젠 나이를 먹다 보니 최근 들어 계기판에 알림이 하나씩 뜨기 시작했다. 수리해 달라는 알림이다. 그동안은 제조사에서 해주는 보증이 있었기에 딱히 돈 들이지 않고 서비스센터에서 온갖 정비를 받았지만 보증 기간은 진작 끝이 났다. 이제 서비스센터에서 정비를 받으려면 꽤 큰돈이 들기에 손품을 팔아 사설 정비소를 물색했다. 부품도 효능이 비슷한 애프터마켓 제품을 알아봤고, 공임만 주고 하나씩 알림을 지워나갔다. 이렇게 손품, 발품 팔아 저렴하게 수리를 해도 국산차 정비 비용보다는 조금 더 비싼 게 사실이지만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서비스센터 가격에 비하면 한없이 낮은 비용이라 손품 발품 팔아 아낀 금액을 보면 흐뭇한 만족감이 생겼다.


무엇보다 차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점이 재밌기도 했다. 서비스센터에 턱 하니 맡겨놓고 우아하게 대기실에서 제공해 주는 커피나 마실 때는 어떤 정비를 어떻게 했는지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다. 왜? 공짜니까. 공식 센터라 어련히 알아서 잘 정비해 줄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알아보는 족족 절약이 된다. 구동하는 원리를 알아보고, 적합한 부품을 알아보고, 수리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후기들을 읽어보고. 이런 것들이 재밌어져 버렸다.


사실 차에 대해 알아가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차에 대한 공부로 적지 않은 금액을 아꼈다는 만족감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둘 다려니 생각한다.


하나둘 손대기 시작하니 미리미리 예방 정비해야 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에 후다닥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조금씩 정비할 생각이다. 차에 애정을 쏟고 관심을 주는 이 행동을 길게 이어갈 생각이다. 이렇게 관리하다 보면 처음 차를 샀을 때 아내가 했던 말대로 평생 탈 수도 있을 것 같다.



남자들이 3년, 5년 혹은 7년마다 흔히 겪는다는 기변병. 그런 건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한번 내 손때가 탄 것들은 오래오래 간직할 테다. 지갑도 펜도 차도 그리고 사람도. 손때가 타고 내 손에 길이 든 것들이 좋다. 신식도 좋고 새로운 관계가 좋을 때도 있지만 내 손때가 묻은 구형, 오래된 사람은 더 좋다.



난 이걸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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