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더부살이
한라산의 잔설이 녹고 있다. 마치 무명 수건을 어깨에 두른 듯한 모습, 2월 말경 구름과 가까운 능선은 아직 눈으로 덮여 있다. 우리는 한라산의 능선 쪽으로 오르고 있다. 현지에서 마련한 중형 승용차는 어른 넷을 태우고도 너끈히 언덕길을 치고 오른다. 산을 횡단하는 5.16 도로의 갓길 옆에는 지난겨울의 추억 인양 잔설이 아직도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러나 양지쪽의 눈은 이른 봄의 햇살을 받으며 녹아내리고 있다. 아스팔트가 깔린 커브 구간에 마치 눈물 자국 같은 물길을 내고 있다.
제주도에 온 것이 몇 번이던가? 고등학교와 대학 때의 졸업여행, 신혼여행, 아이들이 어릴 적 친구들과의 여행, 지도 교수로 따라왔던 2014년 봄과 두서너 번의 연수… 골몰히 생각하면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저 수동적으로 보고, 먹고, 다녔기 때문일까? 내가 기억하는 제주의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2월 초,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유 사장이 내게 제안했다. 벗이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데 방도 여러 개이고 하다니 같이 가자고… ‘코로나19 때문에 2년간 해외여행을 다니지 못한 아쉬움을 제주도에서나마 털어버리고 오자.’는 생각으로 일행에 합류하기로 했다.
아침에는 영하를 기록하는 쌀쌀한 날씨, 유 사장 그리고 그의 학창 시절의 친구인 김 사장과 나는 2월 23일 오후 2시에 안성에서 출발했다. 이미 2주 전 김 사장이 청주공항에서 출발하는 4시 30분발 제주행 탑승권을 예약했었다. 공항 청사에 도착하여 우리는 짐을 부쳤다. 나는 배낭 외 트렁크와 바다낚시 가방을 올려놓았다.
국내선이 출발하는 공항 2층에는 생각보다 많은 승객이 운집해 있었다. 제주행 비행기는 거의 1시간마다 출발하고 있었지만 빈 좌석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새로운 변종인 오미크론이 나날이 기승을 부리는 때임에도 꺼릴 것 없다는 모습들이다. 우리 일행은 23일 출발하여 3월 2일 돌아오는 7박 8일 일정이다.
동행인 유 사장과는 안성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막역한 지기다. 같은 테니스 동호회원이었고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애주가이어서 자주 만나는 사이다. 김 사장은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만나는 사이로 여행사를 운영하기도 했던 분이다. 어쨌든 여행의 고수와 함께한다니 기대도 되었다.
보잉 737기는 이륙한 지 한 시간 만에 제주공항에 닿았다. 용담 2동 월성리에 소재한 유 사장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빌렸다는 단독주택은 공항에서 가까웠다. 금방 시내버스에서 하차한 뒤 곧바로 숙소에 닿을 수 있었다. 제주시 북쪽에 위치한 용담동은 용두암과 근거리에 있다. 걸어서 10여 분이면 갈 것 같았다. 대문이 없고 곧바로 잔디밭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숙소는 현 소유주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라고 했다. 앞뜰에는 작은 정원과 텃밭이 있었고 건물 뒤에도 텃밭과 몇 그루의 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어른 주먹보다 큰 노란 귤을 여럿 매달고 있는 키 작은 귤나무 두 그루가 먼저 반긴다.
방이 셋인 주택에는 응접 공간, 샤워 시설, 야외식탁, 바비큐 장비까지 구비되어 있어서 별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유 사장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방 하나를 그리고 내가 작은 방을 쓰고 유 사장과 김 사장은 비교적 넓은 안방을 차지했다. 우리는 짐을 대강 푼 뒤, 숙소에서 가까운 동문 시장으로 향했다. 우선 식자재와 여흥을 즐기기 위한 안줏거리가 시급했다.
우리가 찾아간 동문시장은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없을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이래로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곳은 처음인 것 같다. 대다수가 이삼십 대의 젊은 세대들이다. 채소와 생선, 과일과 막걸리, 새우젓과 갈치속젓 등을 산 뒤 식당 코너로 접어들었다. 우선 저녁부터 해결하자는 심산이었다.
우리는 굳이 맛집을 검색하지 않고 눈치껏 식당을 골라 자리 잡았다. 식당들의 메뉴는 대체로 비슷하다. 갈치나 고등어구이나 조림, 회나 덮밥류의 해산물이 위주였다. 우리 일행은 전복죽과 성게 미역국, 성게비빔밥 등을 주문했다.
서빙을 전담하는 아주머니가 밑반찬으로 작은 옥돔구이, 회, 멸치조림 등을 내어놓았다. 유 사장과 나는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시장에서 구입한 막걸리를 꺼내 들었다. 제주에는 나름대로 특산물을 가미한 막걸 리가 다양했다. 땅콩 막걸리, 천혜향 막걸리, 한라봉 막걸리, 감귤 막걸리, 조 껍데기 술 등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씩 시음하고 나서 그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선정해 다음에는 그것만 먹기로 했다.
“엉아 한 잔 하슈!” 유 사장이 잔을 건넨다. 음식은 비교적 정갈하고 값도 시장이라서 그런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식사하면서 첫날 저녁 한 잔 아니할 수 없으니 회를 떠 숙소로 가잖다. 수산물센터의 횟집에서 생선회를 구입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낫다는 생각으로 서빙하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회를 사려고 하는 데 어디가 좋아요?” 그러자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우리 식당에서 떠가면 되지요. 어딜 가요?” “예……?”
오십 대의 마음씨 좋게 생긴 식당 주인이 방어와 참돔, 광어를 회를 뜬 접시를 내밀었다. 회만 정갈하게 가득 썰어놓았다. 가격은 단돈 3만 원. 유 사장이 한 마디 던진다. “이거 횟집에서 먹으려면 엄청 비싼데…” 대강 씻고 난 뒤 시작된 우리의 창단식(?)은 저녁 9시 무렵부터 시작되어 12시를 넘겼다. 그날 막걸리는 전부 빈 통으로 남았고 3만 원어치 생선회는 네 명이 먹기에도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쫄깃한 방어의 기름진 살들은 아직도 제주 겨울의 내음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승용차를 동반하여 우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2층 선실 쪽으로 오르자 거센 바닷바람이 몰아쳤다. 환절기의 거센 바람이 수평선에 주름을 만들고 사라진다. 그래도 갈매기들은 꾹꾹이며 여객선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차를 싣고 닿은 우도, 덕분에 우리 일행은 편안하게 우도 일대를 돌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은 대다수 삼륜 전동차를 대여해서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섬의 외곽도로를 따라가면서 깨끗하고 맑은 바다와 모래사장을 만났다. 간간이 햇빛이 비치면 바다의 색감은 더욱 오묘해진다. 홍조 단괴 해수욕장, 검멀레 해변에서 사진을 찍고 한산해 보이는 중화요리 식당에서 탕수육을 곁들인 짜장면과 짬뽕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해물이 풍성한 짬뽕은 여기가 제주도라고 증명하는 것 같았다.
자동차로 우도 해변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성산항으로 귀항한 우리 일행은 드라이브와 산책으로 제주 동쪽 해안가의 정취를 맘껏 즐기고 어둑할 무렵 갈치와 고등어를 사 들고 귀가했다. 이튿날도 역시 막걸리에 취해 잠들었다. 아마 코도 많이 골았을 것 같다.
제주에서 삼 일차, 평소에는 들지 않는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한라산 능선 쪽으로 향했다. 제주에 오기 전에 관광안내 책자 두 권을 대강 개괄해 보았지만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은 없었다. 오히려 바다낚시를 할 수 있는 해변이나 항구를 검색하는데, 더 신경을 썼었다.
여러 번 오다 보니 다닌 곳도 많았다. 한라산도 두서너 번 올랐고 천지연, 천제연, 정방 폭포, 여미지, 돌고래쇼, 박물관, 미술관 등 여기저기 다녀온 것 같다. 일행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의견 일치가 된 사항 중 하나는 입장료 내는 곳은 가지 말자는 것이고 유명하다는 음식점도 굳이 찾아다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미크론으로 전국이 떠들썩한 이때, 제주도만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 인파로 북적이는 곳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삼가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또한 일행 모두가 이른바 구름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일정을 짜고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차를 몰다가 한림공원에 잠깐 멈추었다. 주차장은 반쯤 차들이 주차해있고, 산책로는 한산한 편이다. 수목으로 가득한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 동백을 만났다. 작은 불꽃처럼 피어난 동백꽃의 색감이 곱다. 겨우내 추위를 인내하면서 봉우리를 만들었을 동백나무의 인고 시간을 상상해본다. 길옆에 도열한 아열대의 식물들을 지나쳐 언덕에 올라 제주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옅은 안개에 덮여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땀을 식히고 나서 우리는 대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산책로를 걸어 내려왔다. 허공을 휘감아 타고 오르는 듯 강인하게 자란 대나무들이 인상적이다.
5.16 도로를 한참을 오르자 마침내 잔설로 뒤덮인 능선이 나타났다. 우리는 잠시 어승생 능선에서 눈 덮인 한라산의 정취를 감상하다가 1100 고지 습지를 돌아보았다. 아직 눈과 얼음이 가득한 습지는 그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대략 여름이라면 어떠할 것이란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내려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연료 부족이란 경고등이 뜬 것이다. 경고등 점등 후에도 40km 정도는 간다고 알고 있지만, 주유소가 보이지 않으니 걱정도 된다. 구글을 검색하여 가장 가까운 쪽의 주유소를 목적지로 설정했다. 대략 20km는 더 가야 닿을 것 같다. 조바심도 들지만 “어쩌랴! 휘발유 떨어지면 보험사에 전화하면 될 터이지…”하는 느긋함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가장 가까운 주유소는 유수암 길에 있었다. 1135번 국도 옆에 자리한 그곳에서 간신히 봉변을 면한 우리는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식당을 몇 군데 검색하다가 펜션 인근에 소재한 현지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 같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김치찌개, 부대찌개, 동태찌개가 주메뉴이다.
우리는 김치찌개, 부대찌개에다 막걸리를 마셨다. 비싸지 않은 밥값, 정갈한 밑반찬이 마치 집밥을 먹는 것 같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 옆의 식당은 우리들의 기대치보다 훨씬 웃도는 만족감을 선사한다. “그래 여행하는 즐거움이 이런 거지!” 기대했던 이름난 음식점에서 실망하는 것보다 우연히 마주한 소소한 행복… 작은 것이라도 모이고 모이면 큰 것이 된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그런 커다란 것을 욕망하고 고대하기보다는 순간순간 가볍게 스치는 작은 행복에 만족할 때 우리의 삶은 진정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전에 느긋하게 출발한 우리는 용두암에 닿았다. 처음 용두암과 대면한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이었으니, 찾아보면 이곳에서 내가 수십 년 전 교복을 입고 찍은 흑백사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십 년 만에 다시 바라보는 용두암은 왜 그렇게 왜소해 보일까? 처음 볼 때는 바다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며 경이롭게 용틀임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마치 배를 깔고 편안히 쉬는 모습 같다. 이 차이는 왜일까? 용두암은 변함이 없을 터인데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도전과 패기, 열정과 꿈을 잃어버리고 그저 현실에 안주해버린 지금의 내 모습이 투영된 탓일 것이다.
용두암 앞바다는 어제보다도 잔잔하고 가끔 여객기가 착륙을 위해 낮게 날아간다. 용연으로 가는 길옆에는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온통 노란 꽃이 봄을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피로가 누적돠어 그런지 목이 컬컬하다. 평소 좋지 않은 후두부에 다시 염증이 생긴 것일까? 혹 코로나는 아닐까, 걱정도 된다. 사실 내 여행 패턴으로 본다면 오늘은 소일하면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혼자서 쉬겠다는 말이 내키지 않아 따라나선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들른 용연은 깊고 푸른 물색을 보여준다. 새로이 난 듯한 출렁다리에서 사진을 찍는다. 일행들과 팔각정까지 걸어서 다녀온다. 출렁다리에서 유럽에서 온 듯한 머리가 금발인 가족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지나친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김 사장이 한치 빵을 사 들고 왔다. 따끈한 한치 빵을 들고 벤치에 앉았다. 한치 모양의 빵에는 진짜 한치가 들어있다. 달걀과 버터 냄새 그리고 간헐적으로 씹히는 한치의 살이 잘 어울린다. 그래 여행의 재미 중에는 길거리 음식 먹고 있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도두항을 지나 이호테우해변 구암, 고내 포구를 거쳐 애월항쯤에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내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 같다.
제주시로 돌아오는 길에 돼지 목살과 숯을 샀다. 저녁에 바비큐 파티를 열기 위해서다. 토치만 있으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숯불 피우느라 김 사장 유 사장이 고생이다. 부치고, 불고, 뒤적이면서 간신히 벌겋게 숯불을 피웠다. 그리고 목살을 구웠다. 센 불에 구운 탓인지, 검불이 묻은 탓인지 색깔은 별로 지만 맛은 최고다. 나는 엊그제 사놓은 갈치속젓에 고추와 소주를 넣고 불 위에 올려놓았다. 제주 특산물인 꽃멸젓은 아니지만, 맛은 거의 비슷한 갈치속젓에 찍어 먹은 돼지 목살은 등심보다 더 맛있다. 적당히 섞인 비계와 익어 바삭한 촉감까지, 물론 그날도 여러 병의 막걸리가 비워지고 쉽게 잠이 들었다.
오늘은 날이 흐리다. 비도 예보되어 있다. 그래선지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몸과 마음을 가라앉게 만든다. 일행에게 오늘은 혼자 쉬겠다고 통보한다. 나를 제외하고 멤버들은 곶자왈과 오름에 간다고 한다.
오전 동안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따뜻한 장판에 몸을 누였다. 뉴스에서는 오미크론의 확산을 연이어 보도한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확진자들… 김 사장의 친척이 독일에서 보내주었다는 자가검사 키트로 검사를 해보았지만, 정상을 나타내는 한 줄이다.
점심이 훨씬 지난 서너 시쯤에 집 밖으로 나섰다. 길 건너편에 고기 국숫집이 있다. 제주도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것이 고기국수, 보말 국수라고 하는데 느끼할 것 같아서 눈길이 가지 않는다. 나는 비빔국수를 시켰다. 비교적 깔끔한 맛은 여행자와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춘 듯하다. 입맛이 텁텁하여 시킨 비빔국수는 예상보다 단맛이 강하다.
늦은 오후 일행은 막걸리와 목살 그리고 토치를 사 들고 돌아왔다. 저녁 메뉴는 제주도 흑돼지 목살구이다. 숯불 피우기는 토치가 있어서 간단하게 끝나고 숯불이 잔잔해질 무렵 나는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비게 기름이 떨어져 불이 세어질 때마다 고기를 털어내면서 굽자 제대로 노릇하게 구워진다. 갈치속젓에 찍어 먹는 숯불구이 목살은 오늘도 맛있다. 유 사장이 한마디 한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그동안 왜 안 해 먹었지! 엉아 안성 가면 우리 농장에서 한번 해 먹자!”
2월 마지막 날이다. 제주도에서 지낼 날들도 이제는 이틀 남았다. 하루를 쉰 나는 일행에게 가세해 올레길 탐방에 나섰다. 우리가 가는 곳은 외돌개에서 월평까지 이어지는 7번 올레길이다. 이전에도 두 번인가 걸어본 적이 있다. 서귀포 쪽 바다를 끼고도는 이 코스는 해안절벽과 바다, 해변이 어울리는 절경이다. 무릎이 안 좋은 김 사장은 차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유 사장과 친구는 먼저 출발하였다. 나는 김 사장과 커피를 마신 뒤 루어낚시 장비만 배낭에 꽂은 뒤 뒤따라 나섰다.
워낙 유명한 올레길이니 관광객들도 제법 있었지만, 외돌개 근처를 지나자 그나마 한산해졌다. 잘 익은 과실을 가득 달고 있는 귤나무들을 지나 평탄한 언덕에 오르자 잔설로 덮인 한라산의 남쪽 얼굴이 보인다. 길가마다 유채꽃들이 한 무리 피어 객들을 반긴다. 나는 사진에 풍경을 담는다. 돌담과 유채꽃은 서로 다르지만, 같이 있으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돌베낭골을 지나며 작은 가게와 포장마차가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교수 연수를 왔을 때, 할머니 해녀가 파는 홍해삼에 막걸리를 마셨었다. 그 할머니는 홍삼은 산삼과 버금간다며 남자들의 정력에도 좋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그곳에서 막걸리를 같이 한 교수들은 제주도 연수의 기억은 홍해삼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바닷가에 접해 있는 포장마차를 지나치며 홍해삼에다가 막걸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서귀포 여자고등학교 쪽으로 접어드는 길에는 펜션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남향으로 자리한 펜션 어느 곳에 묵더라도 경치는 참 좋을 것 같다. 만약 가족과 함께 온다면 이쯤 어디에 묵으면 좋을 것 같다. 가까이 갯바위 낚시 포인트도 형성되어 있으니까.
속골 다리를 건너는데 유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엉아 어디쯤 왔어?” “나 지금 다리를 건넜어!” 유 사장과 친구는 이삼백 미터쯤 앞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같이 길을 걷게 되었다. “오늘은 참 날씨도 좋다.” 유 사장이 정취에 젖어 한 마디 건넨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날, 바다도 잔잔하다. 멀리 몇 척의 배가 떠 있는 것도 보인다. 쉬엄쉬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법환포구에 도달한다. 긴 방파제와 포구의 널찍한 공터는 비어있다. 포구 내의 방파제 끝에서 조사 둘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나도 가지고 온 루어 대에 릴을 장착한다. 방파제 끝에서 지그헤드에다 인조 미끼를 끼우고 캐스팅한다.
아직은 밀물이 아니고 물도 맑아 볼락이 물어줄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잡으려면 밀물이 드는 저녁이어야 한다. 그러나 안 잡히면 어쩌랴. 그저 던져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면 될 것이니… 방파제 끝에서 찌낚시를 드리운 조사들도 잠잠하고 이곳저곳 바닥을 긁으며 고기를 유인해 보는 나도 마찬가지다. 20여 분을 탐색하다가 결론을 내린다. 철수다.
강정 포구 쪽으로 향하다가 길 곁에서 옥돔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들과 마주쳤다. 맛있는 식당을 묻자 동리길을 지나 우회전하란다. 강정항구의 풍경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식당은 규모가 컸지만, 손님은 우리뿐이다. 앉자마자 먼저 주문한 것은 막걸리다. 그리고는 몇 가지 음식들, 반찬이 깔끔하고 정갈하다. 그러나 값은 육지보다 30% 정도는 더 비싼 것 같았다. 한참을 걷다가 뒤늦게 먹는 점심, 꿀맛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 여행은 보고, 먹고, 사는 즐거움으로 다닌다고 했던가. 제주에서 식도락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행복한 여행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일기예보가 딱 들어맞았다. 비가 온다더니 오전에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그러나 양도 많지 않고 곧 그칠 것도 같다. 오늘은 제주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다. 오늘 일정은 내가 제안한다. 동쪽의 구좌읍에 소재한 육상양식 단지 근처로 가보고 싶었다. 언제인가 낚시 프로그램 중 양식 단지 앞에서 지그헤드로 광어를 끌어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검색해보니 그 앞의 바다 풍경도 괜찮다고 한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세어서 갯바위는 물론 포구에서 낚시도 불가능할 것 같아서 선택한 곳이었다.
두 시간쯤 드라이브하다가 구좌 쪽의 바닷가에 닿았다. 양식 단지 앞에는 마치 연못 같은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양식 단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바닷물과 합쳐지는 곳이다. 두서너 명이 내항과 외항 쪽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캐스팅에 적절한 곳을 골라 나도 탐색을 시작한다. 물이 맑아 고기가 있다면 보일 듯도 한데 조용하다, 그래도 여기저기를 캐스팅을 하다가 사진만 찍고는 두 손을 든다, ‘못 잡으면 어쩌랴 그래도 시도는 해보았으니… ’라고 혼자 위로하며 낚싯대를 접는다. 낚시하던 다른 일행들도 모두 철수한다. 바람이 워낙 거세고 아직 이른 봄이다. 그래도 낚시를 통해 제주 바다와 교감을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하루가 아닌가.
바닷가를 거닐다가 우리는 김녕항을 지나 함덕해수욕장 쪽으로 향했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해안도로는 늘 낭만적인 정취를 풍긴다. 함덕해수욕장 쪽으로 향할수록 차도 많아진다. 유 사장과 친구는 김녕과 함덕 중간쯤에 내린다. 걸어서 갈 터이니 해수욕장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김 사장과 나는 먼저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카페로 들어선다. 해수욕장의 정경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수욕장에는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보이고 산책하는 연인들도 자주 눈에 띈다. 아마 올여름이면 주차할 데 없을 정도로 붐빌 것이다. 카페에서 쉬면서 함덕해수욕장의 풍경을 카카오톡에 올렸다.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큰아들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아빠 거기 함덕이지?” “함덕의 000 음식점의 칼국수 맛있어요!” “내 인생의 칼국수였어요!” 나는 곧바로 구글로 검색했다. 그러나 어쩌라 이미 영업시간이 종료된 후였으니… 유명한 집이라서 그런지 일찍 문을 닫는다고 한다.
함덕해수욕장을 벗어나면서 카페의 주인에게 식당을 추천받았다. 해수욕장에서 벗어나 주거지역에 위치한 음식점은 대로와도 가까웠다. 전복 돌솥밥,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옥돔구이, 물회가 주메뉴였지만 역시 물회는 4월부터란다. 실내에는 벌써 여러 팀이 식사를 하고 있다. 돌솥밥 정식과 전복 돌솥밥을 주문했지만 고등어조림이 큰 접시에 가득 담겨 나온다. 기본 반찬 중 하나이란다. 간장을 주 소스로 한 고등어조림의 맛은 독특하고 일품이다. 모든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다. ‘역시 현지인에게 묻는 게 최고다’란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남은 고등어조림이 아까우니 싸 달라고 하자 주인장은 고등어 몇 토막을 더 넣어서 준다. 저녁 반찬 한 가지가 해결된 셈이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만나는 행복이 이런 것일 터이다. 나는 이 식당의 간판을 사진에 담는다. 언제 이 근처를 지난다면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에… 책자에도, 인터넷에도 소개되지 않은 곳이지만 몇 년 지나면 혹 줄을 서야 될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식당이 더 잘되기를 바라면서 그곳을 떠났다.
함덕을 떠나면서 제주 바다를 본다. 용암이 식어서 만들어진 검은 돌밭, 흰모래와 늘 푸른 바다. 여자, 돌, 바람이 많아서 삼다도라고 불린 섬. 요즘에는 ‘삼다도’란 말을 그리 자주 쓰지 않는 것 같다. 아마 코로나가 없었다면 중국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것인데, 아직은 한산한 듯한 아름다운 섬. 큰 욕심도 없고 가슴 설레는 기대도 하지 않고 닿은 제주에서의 7박, 예기치 않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난 사람들, 사물들과 안녕을 고할 시간이 다가왔다. 만남은 필연적으로 헤어짐으로 이어지는 것이니까 아쉬움은 없다. 많은 기억이 아니더라도 몇 가지만 간직하더라도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행복할 테니까. 안녕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