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시인의 중앙아시아 여행기. 3
미니버스는 해발 3,500미터에 달하는 고개를 오르고 있다. 차창 너머로 바위와 초지 그 너머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하늘과 맞닿은 곳은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덮인 봉우리들이 솟아있다. 능선을 돌아서자 천산산맥의 위용이 그대로 드러난다. 전에 이미 느껴보았던 감각… 술 한 잔을 마신 듯한 조금은 어질어질한 느낌, 그것은 고산에 반응하는 나의 몸의 증상이다.
이 높은 곳까지 미니버스로 올라왔다. 예전에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파키스탄이나 네팔의 아찔한 고갯길은 아니지만, 바깥쪽 창가 아래로 보이는 아찔한 계곡을 지나자 비교적 평평한 능선이 그리고 그 구릉마저 지나자 갑자기 시선이 트이고 햇빛을 받고 반짝이는 호수와 드넓은 분지가 펼쳐진다.
러시아계 운전기사는 조심스럽게 핸들을 돌린다. 차는 비포장도로를 지나 풀밭으로 이어지는 평원에 접어들었다. 저 멀리 유르트들이 보인다. 유르트는 이곳저곳 연이어 있다. 유르트 주변으로 방목된 말과 야크들 그리고 그 주변을 서성이는 개들도 보인다.
‘마지막 호수’라는 뜻을 지닌 송쿨 호수는 주변의 산에 둘러싸여 있다. 만년설로 덮인 봉우리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천산산맥 아래, 낮은 지대로 흘러든 눈 녹은 물이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높은 곳은 해발 3,400m의 고지대이지만 산 구릉을 타고 내려와 형성된 넓은 초지와 호수는 가축을 방목하기에는 최적일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은 대부분의 국토가 고지대인 산악 국가다. 하지만 파미르 고원과도 인접해 있어서인지 고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초지가 있고 또한 강이 흐르기도 하며 호수가 있다. 또한 설산 아래에는 넓은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사면의 대지를 멀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 맑은 공기와 하늘, 강렬한 태양 아래 펼쳐진 설산과 구릉 그리고 그 아래 넓게 펼쳐진 초원과 호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이동 가옥인 유르트 안에는 침대가 놓여 있다. 이 교수와 나는 침대 넷이 놓인 비교적 작은 유르트를 쓰기로 했다. 두 끼의 식사를 포함한 숙박비는 1인당 1,200 솜 우리 돈으로 약 2만 원 정도이다.
송쿨 호숫가는 낮에는 바람이 없었다. 춥다기보다는 선선한 날씨, 일행은 얇은 다운 외투를 꺼내 입었다. 저녁 식사는 오후 7시, 아직은 두 시간이 남아있다. 윤 선생님은 승마를 권유한다. 1시간 동안 한 명의 가이드와 함께 한 승마는 1인당 500 솜이다. 우리 돈으로 만원이 채 안 된다.
한 달 전 테니스로 다친 다리와 근육경련으로 통증이 남아있는 왼쪽 정강이도 안 좋지만 그래도 시도해본다. 말을 타본 지가 벌써 아득하다. 필리핀의 화산섬 따가이따이(Tagaytay)에서 산길을 30분 타고 오른 적도 있고 리장인가 캄보디아인지 불분명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오래 탄 적도 있었지만, 말고삐를 쥐자 긴장이 된다. “추우! 추우!”하면서 추임새를 넣으니 말은 일행을 따라 순하게 걷는다. 승마 일행 여섯은 가이드와 함께 평원을 걸어간다. 말과의 교감을 이루려 시도하면서 긴장을 풀자 그나마 편안해진다. 해가 뉘엿뉘엿한 늦은 오후, 산맥의 봉우리들이 마치 강강술래를 하듯 넓은 평원을 감싸고 그 가운데에는 폭 18km 길이가 29km에 달하는 호수가 있다. 송쿨은 이식쿨에 이어 키르기스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다. 말의 등 위에 앉아 호수와 고산지대의 풍광을 감상한다. 언젠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보았던 곳에 내가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저녁에 접어들자 점차 바람이 거세어진다. 유르트의 출입문이 덜컹거릴 정도다. 바람은 평지와는 달리 차가운 혓바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얇은 나의 청바지와 얼굴을 핥고 지나간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잠시 노을이 서녘으로 번진다. 아이잣이 저녁을 먹으라고 소리친다.
유르트의 주인 내외가 차린 저녁은 소고기와 야채로 만든 볶음밥인 쁠롭, 오이와 토마토 위주의 샐러드 그리고 굽거나 튀긴 빵과 버터, 베리로 만든 잼 등이다. 아울러 중앙아시아의 식탁이 그렇듯 과자와 사탕도 상에 올려놓았다. 고산지대라서 맥주 대신 우리는 뜨거운 차를 마시며 빵을 뜯는다. 그리고 비슈케크에서 출발할 때 사 온 수박, 중앙아시아의 멜론인 딩야, 체리를 후식으로 먹었다.
고원에서 완전히 해가 저문 저녁 9시가 되자 밖은 나돌아 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거세고 또한 춥다. 나무와 천막으로 지어진 유르트는 웃풍이 세다. 날은 점차 추워질 것이고 우리는 오리털 외투를 입은 채로 잠들어야 할 것이다.
통신도 끊긴 해발 3,000미터의 유르트에서 나는 노트북을 꺼내어 하루 일정을 정리하고 이 교수는 휴대전화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밖에서는 개들이 짖고 있다. 소똥을 태우는 화덕이 있지만 우리는 불 피우기를 거절한 상태, 춥더라도 편안하게 잠들기를 기원한다. 나는 핫팩을 꺼내 속옷에 붙이고 배터리가 다 소진된 휴대전화를 노트북에 연결하여 충전한다.
아홉 시 반이 넘자 바람은 잦아들었고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남아있던 노을마저 사그라져 어둠만이 고요해진 평원을 채우고 있다. 일정이 피곤했는지 이 교수는 벌써 잠들어 있다. 다른 일행도 모두 조용하고 윤 선생님은 홀로 기타를 켜고 있다. 은은하게 들리는 기타 소리와 바람 소리, 호수 건너편의 길을 지나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만이 보이는 어쩌면 신기한 또 다른 세상에서 나는 별을 생각한다. 도심의 불빛과 황사와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의 고운 눈매를 기다리고 있다.
벌써 밤 열 시가 넘었다. 유르트 밖으로 나오자 달빛이 평원에 가득하다. 밝은 달빛 때문인지 별들은 기대보다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습관적으로 북두칠성이 어디에 있나 찾아본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서 그런지 북두칠성의 국자도 오리온자리의 삼태성도 찾을 수 없다. 위도 탓일까 구름 탓일까? 천문학에 빈약한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둠 저편에서 당나귀가 울고 있다. 힝힝이 아니라 장가 못가 서러운 떠꺼머리총각처럼 꺼억 꺼억 울고 있다. 해가 질 무렵 호숫가에서 산책하던 우리는 뚱뚱한 한 사내가 당나귀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 나귀는 마치 “크악! 크악!” 고함치듯 소리를 질러댔었다. 우리 일행은 나귀가 너무 힘들어서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호숫가에 잠시 손을 담그고 돌아오는 길에 말뚝에 묶여 있는 그 나귀를 만났다. 이 교수는 그와 언제 친해졌는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나귀는 나의 손에 입을 갖다 댄다. 아이잣이 ‘당나귀가 사탕 달라는 거’라고 내게 말해준다. 나는 가방에서 초코바를 꺼냈다. 그러자 아이잣은 웃으면서 “그거 나를 주세요!”라고 한다. 이 교수가 초코바를 둘로 나누어 나귀와 아이잣에게 주었다. 나는 가방에 넣어둔 땅콩을 꺼내 들었다. 이 교수가 한 마디 던진다. “내가 만약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면 말이나 나귀보다는 개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누구를 태우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개가 이곳에서는 상팔자다. 젖과 고기, 가죽과 털, 뿔까지 전신을 내어주는 소, 말, 야크, 양보다는 개가 훨씬 신세가 좋은 듯하다. 이곳 평원에서는 산책하듯 어슬렁거리는 가축 몰이 개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와이파이는 물론이고 자체 통신도 불가능한 오지에서 배터리는 참 쉽게 소모된다. 아침에 가득 충전해왔는데 오후도 제대로 못 넘긴다. 수신하랴, 사진 찍으랴, 지도 검색, 목적지 검색하랴 휴대전화도 어지간히 바빴을는지도 모른다. 내가 오늘 일정의 초고를 작성하는 동안 그래도 80퍼센트는 충전되었으니 내일 하루는 사진기 기능은 가능할 것도 같은데, 내일 일은 아무래도 그때 가 봐야 알 것 같다.
이 교수가 잠든 사이 나는 손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개들이 일제히 짖는다. 덩치가 큰 개들 때문에 늑대가 있다고 해도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가득한 가운데 몇몇 유르트는 흰 연기를 내뿜고 있다. 아마 화덕에 말과 소의 말린 똥을 태우고 있는 것이리라. 벌써 밤 11시 나도 내일을 위해 잠들어야 할 것이다. 적막하고 고요한 고원의 평원 위에서 나도 하룻밤을 편안히 잠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