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볼 만한 공연, 그러나 너무 긴
먼저 장르 문제부터 짚고 가자. 한국에서 이 작품은 '뮤지컬'로 홍보되고 있지만 실은 연극—더 정확히는 일본식 음악극이다. 존 케어드는 원작 대사를 거의 그대로 쓰면서 감정의 정점 몇 군데에만 노래를 삽입했다. CJ ENM이 이걸 뮤지컬이라 부르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라고. 한국에서 연극 티켓은 19만 원에 팔리지 않는다.
본론.
무대 디자인을 맡은 존 바우저는 360도 회전하는 아부라야 온천 세트를 만들었는데, 이 선택이 생각보다 훨씬 유효하다. 무대에서 공간이 직접 돌아올 때 관객은 움직이지 않아도 세계가 자신을 향해 펼쳐지는 감각을 얻는다. 무대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며 이 공연의 숨은 주인공이다.
영화를 보며 '이게 무대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던 장면들이 실제로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순간은 경이롭다. 퍼펫티어들의 활용 방식이 이 무대를 가능하게 했다. 무대 밖에서 퍼펫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며 퍼펫과 함께 연기한다.
보일러실 숯검댕이들을 퍼펫티어들이 연기하는 방식, 유바바가 센을 처음 만나 화내는 장면에서 그 얼굴이 점점 커지는 처리—이런 순간들에서 이 공연은 '애니메이션을 재현한다'는 목표를 넘어서 무대를 찾는 이유를 만들어낸다.
퍼펫 디자이너 토비 올리에가 투입한 50체 이상의 퍼펫 중 4미터짜리 하쿠의 용은 털 4,000가닥을 수작업으로 심었다는데, 관객석을 휘돌아나갈 때는 정말 멋지다.
세개의 초록 머리에 대한 표현 방식도 좋았다. 퍼펫티어는 스모선수같은 복장을 하고 이 세개의 초록머리를 연기한다.
오물신에게서 쓰레기를 뽑아내고 강의 신이 드러나는 장면—그 슬로우 모션의 처리는 이 공연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는 순간 중 하나다. 다른 장면들이 영화의 재현이었다면 이 장면은 무대의 특성을 영리하게 활용한 멋진 무대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 장면.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이 공연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도 좋았지만 11인조 라이브 오케스트라로 들으니 차원이 달랐다. 오케스트라는 커튼콜 때까지 무대 뒤에 숨겨져 있다. 관객은 3시간 내내 음악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 채 그 안에 잠긴다. 이 공연을 위해 삽입된 오리지널 넘버 3곡도 좋았다. 존 케어드의 말에 따르면 가마 할아범의 여섯 팔과 목욕탕 정령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래를 넣었다고 한다. 주인공 치히로는 단 한 곡도 부르지 않는다. 오리지널 넘버들이 좋았기 때문에 2막에서 몇 곡 더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특히 기차를 타고 제니바를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분명히 노래가 나올 타이밍이었는데...
뮤지컬에 대한 감상과 별개로, 이 공연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은 유바바에 관한 것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개봉한 건 25년 전이다. 그때는 유바바를 그냥 마녀로 봤다. 그 사이 나는 회사에서 임원도 해보고 퇴사 후 창업해서 회사 운영도 해봤다. 같은 캐릭터를 지금 다시 보니 다른 것이 보였다. 일본식 경영인의 완벽한 현신이 아닌가.
유바바는 생각보다 나쁜 마녀가 아니다. 맹세를 했으니 일하겠다는 자에겐 반드시 일자리를 준다!(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센이 오물신을 강의 신으로 돌려보냈을 때 기분 좋게 회식도 쏜다. 하쿠와의 약속을 지키며 센의 부모를 돌려보낸다. 규칙 안에서는 공정하다.
무엇보다 그는 탁월한 직업정신을 갖추고 있다. 오물신이 들이닥칠 때 "오는 손님을 거절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고, 가오나시가 사금을 뿌려 욕탕이 아수라장이 되는 순간에도 "손님이 아직 계신다"고 외치며 강의 신이 나갈 문을 열라고 명한다. 탐욕스럽지만 손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한다. 나쁜 고용주가 아니라 완벽한 자본가다. 츤데게 같기도 하다.
그런데 냉혹함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하쿠에게 계약 도장을 훔쳐오게 시킨 뒤 상처 입은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순간이다. 유바바에게 '정'의 대상은 아들 하나뿐이다. 그 외의 관계는 전부 계약이다. 어떤 면에서 유바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의 모든 고용주들을 은유한다. 착취하지만 규칙은 지키고, 일자리를 주지만 정 같은 건 없고, 탐욕스럽지만 서비스는 완벽하다. 미야자키 본인도 "유바바는 악당이 아니다. 욕탕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제니바와 쌍둥이 마녀 설정은 한 인간이 갖고 있는 두 개의 면을 보여주려고 하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미야자키의 말에 따르면 제니바는 처음부터 쌍둥이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제작 막바지에 스태프가 새 캐릭터 추가를 말리자 쌍둥이로 해결했다고.
실제로 내가 볼 때는 2시에 시작해서 3:30분에 인터미션이 시작됐다. 공식 러닝타임은 180분, 실제 공연은 160분이다. 공연의 길이는 적절했나?
개인적으로 2막의 75분에서 이 공연은 다소 힘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무대장치의 경이로움은 이미 1막에서 소진됐다. 무엇을 봐도 이제 신기하지 않다. 그리고 원작 애니메이션도 후반부의 기차를 타고 제니바를 찾아가는 시퀀스, 제니바와의 대화 등은 전반부의 시끌벅적함에 비하면 서정적이고 잔잔하다. 애니메이션의 상영시간 125분일 때는 못느꼈는데 무대에서 이 2막은 사실 지루했다.
2막의 하이라이트—하쿠의 이름을 되찾고 용에서 소년으로 돌아오는 순간—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연출의 실패라기 보다는 1막에서 보았던 다른 장면들에 비해서 놀라울 게 없었던 것.
존 케어드가 원작의 한 장면도 생략하지 않기로 한 선택은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일 듯. 1막에서는 그 밀도가 미덕으로 작동하지만 2막에서는 다소 애매하다. 무대화의 근본적 질문은 '왜 이걸 무대에서 봐야 하는가'이다. 1막은 그 질문에 매 장면 답한다. 2막은 좀 생략을 해도 좋을 디테일들이 있고 또 오리지널 넘버를 추가해서 서정성을 보완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튼콜에서 오케스트라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알고 갔지만 역시 가슴이 벅찼다. 세 시간 동안 무대를 가득 채웠던 음악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이 공연의 찐주인공 중 하나가 모습을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짧게 평하자면 1막만으로도 이 공연은 올 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러닝타임은 너무 길다.
3/11일(수) 2시 타임 배우는 이랬다.
개인적으로는 린/엄마 역의 배우 히나미 후우가 인상깊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과 에너지.
치히로는 전체 160분 중 거의 모든 장면에서 다 나온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몰랐는데 이 역을 소화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일 듯.
가오나시는 관객들의 박수를 가장 많이 받은 캐릭터 중 하나였다. 춤이 좋았다. 그리고 가오나시라는 캐릭터 자체—사랑받고 이해받고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하는 존재—가 25년 전보다 지금의 관객에게 더 깊이 닿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