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스포 포함
외계인 로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낀 영화. 그리고 로키라는 특별한 존재를 만난 주인공 그레이스가 부러웠다.
완전히 다른 존재인데 서로를 이해하려고 온 힘을 다하고, 그게 실제로 통하는 순간을 지켜 보면서 삶의 길이보다 밀도가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아주 작은 시간을 그렇게 강렬하게 보내고 바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영화를 보는 내게 2시간이기 때문이고, 영화 속에서 그레이스와 로키는 미션을 같이 수행하며 꽤 긴 시간 동안 아웅다웅한다.
두 존재가 처음 소통을 시작하는 장면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였는데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는 긴 호흡과 대비되었다. 테드창의 단편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Stories of your life >에서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고, 그게 그 영화의 철학적 핵심이었다.
헤일메리에서 로키와 그레이스는 둘 다 엔지니어다. 숫자는 우주 공통의 언어라는 전제 아래, 컴퓨터로 빠르게 공통 언어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문제 해결에 들어간다.
이 영화의 원작자 앤디 위어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이다. 블리자드에서 워크래프트 2 개발에 참여했고, 자기 웹사이트에 무료로 연재한 소설 ‘마션’이 킨들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엔지니어적 배경이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느껴진다.
앤디 위어의 주인공들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맥가이버 같다. ‘마션’도 그랬고 이번 PHM에서도. 마션에서 화성에 있는 주인공과 지구에 있는 과학자/엔지니어들이 함께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했다면 PHM에서는 로키와 그레이스가 같이 문제를 해결한다.
앤디위어는 조사에 집착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레딧 AMA에서 "조사가 글쓰기 중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마션의 화성 환경, 헤일메리의 물리학과 생물학 설정이 실제 과학자들한테도 호평받을 정도다. SF인데 판타지가 아닌 느낌이 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문제 해결 방식이 환타지가 아니다.
지난 ‘마션’에 비해 이번 PHM이 좀 더 흥미롭게 느껴졌던 이유는 로키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아무 두려움 없이 외계인의 우주선에 뛰어들어 호기심에 미쳐 돌아다니는 로키는 낙천적이고 외향적인 엔지니어 그 자체. 그리고 ‘나는 원래 용기가 없는 인간’이라며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던 그레이스가 망설임 없이 로키를 구하기 위해 항로를 바꾸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영화는 낙천적인 소년 만화 같은 느낌도 준다.
로키가 영화에 등장하기 전 두근거리며 로키라는 외계인을 작가가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최근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앤디 위어는 로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머릿속에 만들긴 했지만 상상력이 뭉뚱그려져 있어서 디테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만들어진 로키를 봤을 때 정말 놀라웠다."
나는 공상할 때 비쥬얼로 보기 때문에 이 답변이 꽤 놀라웠다. C.S. 루이스는 나니아연대기를 우산을 든 파운(목신)의 이미지로 시작했다고 했는데 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이렇게 머릿속에 그린다고 생각했었다.
앤디 위어는 비주얼이 아니라 논리와 시스템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작가다. 로키를 설계할 때도 "어떻게 생겼는가"보다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 창조주도 완성된 로키를 보고 놀랐고, 나도 로키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소설 그리고 영화의 구조상으로도 작가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 그레이스는 부분적 기억 상실 상태로 본인이 왜 PHM 우주선 안에 혼자 남아 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로키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그 미스터리도 같이 풀린다. SF 장르에 미스터리 구조를 넣은 것인데, 관객은 그레이스가 기억을 되찾는 속도로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덕분에 영화 끝까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 구조 역시 컨택트(Arrival)를 떠올리게 한다. 컨택트에서는 루이스의 과거 이야기와 외계인 언어 해독이 동시에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두 선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두 영화 모두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풀려나가다 수렴하는 방식을 쓰는데, 컨택트가 그 수렴 지점에서 시간의 철학을 꺼낸다면 헤일메리에서는 그레이스라는 인간의 성장이 완성된다.
컨택트가 시적으로 아름다운 영화였다면 헤일메리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다. 앤디는 픽션은 즐거워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뉴욕타임즈 2017 인터뷰에서 “디스토피아를 싫어하고 내용이 지나치게 암울 또는 심각하거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것은 기피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 픽션은 현실도피의 한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현실세계에서 떠나고 실을 뿐 그 주변에 머문 채 스트레스를 받을 생각이 없다. 내가 펴낸 스토리의 의도는 순전히 현실도피적이다. 나는 독자가 내 스토리를 읽고 재미있다고 느끼기만 하면 된다.”라고도. 그의 작품은 감정적으로 안전한 선택이다.
올 해는 외계인과의 조우를 그리는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디스클로저 데이. 그 영화에서는 외계인을 어떻게 그릴지 기대에 차서 기다리는 중이다.
PS.
앤디위어는 레딧에서 글쓰기에 대한 최고의 조언으로 “ 친구들한테 당신의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그러면 청중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어서 실제로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이 꺾여요. 당신의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걸 읽는 것뿐이라는 규칙을 스스로 만드세요. 쓰고 있는 챕터들을 친구들한테 주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말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라고 했다. 언젠가 소설을 혹시 쓰게 된다면 기억할 만한 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