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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an 20. 2023

12. 한림 협재해수욕장, 애월 곽지해수욕장, 심야식당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12) 제주와 인생의 동서남북(230120)

오늘은 통 가지 않았던 서쪽바다를 구경할 참이었다. 내일부터는 설연휴이기도 하고 제주는 당분간 눈과 비소식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오늘 멀리 다녀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쪽이라면 한림과 애월이 떠올랐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협재해수욕장과 곽지해수욕장을 들러보기로 했다.


서쪽이니 202번 버스를 타야 했는데 오늘은 여태껏 탔던 버스들 중 인원이 가장 붐볐던 버스였다. 심지어 나를 제외하면 모두 할머님, 할아버님들 뿐이라 단체로 떠나시려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빈자리도 거의 없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내 자리 하나는 있어서 긴 버스여행이지만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 달렸을 무렵, 금능해수욕장을 지나 협재해수욕장을 도착했다. 금능해수욕장은 있는 줄도 몰랐는데 협재 옆에 있던 작은 바다였다. 저기도 기회 되면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오늘은 협재부터 들렀다.


 

협재해수욕장에 내리자마자 만났던 조각상. 해녀 조각상이 가장 눈에 띄었다.


협재해수욕장은 너무 관광지스럽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의 바다였다.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여긴 파도가 높이 올라오는지 모르겠지만 모래사장에 발이 푹푹 꺼졌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진흙탕을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걷는 데에 조금 어려움을 느끼며 바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돌탑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돌탑은 협재에서만 볼 수 있던 장면이었다. 

군데군데 돌탑이 쌓여있던 협재. 돌탑을 만든 손길은 어떤 마음으로 쌓아 올렸을까.


정말 돌탑에 돌 하나 얹는다고 원하던 일들이 이루어질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꼭 소원이 이뤄질 거라 믿으며 돌탑을 쌓을까. 돌탑을 쌓는다는 건 일종의 객관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걸 돌이라는 물질에 투사시켜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바꾸면 좀 더 객관화가 잘 되지 않을까. 그렇게 객관화된 물질들을 쌓아 올리면 더 커다란 의미를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도움 되는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N스러운 생각들을 하며 나도 돌 하나를 올리고 왔다. 내 소원은 비밀.

작은 돌, 아니 작은 소원 하나를 덧붙이고 오는 길. 모두가 그렇게 여기듯 내 소원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소원 하나 더하고 무작정 바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살짝 달라진 바다임이 느껴졌다. 걷다 보니 금능해수욕장까지 넘어왔던 것. 협재와 이렇게 가까운 줄도 모르고 금능은 다음에 올 생각을 했었는데 뜻밖의 모습에 반가웠다. 금능도 한 바퀴 둘러보고 뒤편에 협재로 이어진 길을 따라 다시 협재로 향했다. 

금능에서 다시 협재로 돌아가는 길. 사진에서 보면 알듯이 오늘은 바람이 굉장한 날이었다. 과장 보태면 날아갈 뻔했다.


금능을 뒤로하고 다시 방향을 틀어 걷다 보니 협재였다. 협재에 있던 식당가나 카페도 구경하고 조각상도 구경하다 보니 협재는 금세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신기한 점은 협재에 스타벅스가 있었다는 점. 여기에 스타벅스가 입점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올까 싶었지만 오늘은 워낙 춥고 바람 부는 날이니 사람이 적었을 뿐이지 여기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인가 보다 싶은 생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드를 쓰면 뭘 하나. 수평 맞추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나 보다. 생각보다 어려운 사진 찍기. 잘 있어 협재!


협재를 떠나 곽지로 가려면 아까 내렸던 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더 가면 되었다. 그래서 정류장에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갑자기 잊고 살던 증상이 다시 느껴졌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왜 하필 지금 여기서 이 증상이 나타난 거지? 왜 지금이지? 이러다 갑자기 당연하게 여기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어쩌지? 나는 다시 종합병원 신세를 지며 환자로 살아야 하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순식간에 두려움과 공포에 잠식되었다. 다시 심호흡을 시작했다. 죽을병은 아니라고, 그냥 갑자기 너무 추워지고 환경이 변해서 그런 거라고, 산발적으로 느껴지는 증상 중 하나일 뿐이라고, 곧 지나갈 테니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실 인생이 그렇다.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치더라고 나는 그저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돌보아야 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애초에 인생의 디폴트값은 고난이기에 설령 완치판정받은 병이 재발했더라도, 혹여나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죽기 전까지 그저 살아내야 한다. 그게 내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이다. 가끔은 그 최선이 너무나 버겁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나가기로 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버스를 타는 것.


그렇게 버스를 타고 달린 끝에 곽지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동덕여대 제주연수원, 충북교육청 제주연수원 표지판부터 내 눈에 들어온 걸 보면 직업병도 대단하구나 싶었다. 지금 내 병을 걱정할 게 아니다. 이 직업병부터 어떻게 해야 할 참이었다. 스스로에게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으며 바다를 걷기 시작했다. 곽지해수욕장은 모래길도 협재보다 건조해서 걷기 좋았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따로 깔려 있어서 더욱 편하게 걸어볼 수 있었다. 바다의 모습은 협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양한 빛깔과 현무암, 그리고 모래의 조화. 무엇보다 미친 듯이 불어오는 강렬한 바람마저 비슷했다. 겨울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에 왜 바람이 많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시카고와 맞먹는 수준 아닐까 싶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곽지엔 유난히 갈매기들이 많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원래 갈매기들이 많이 서식하는지 궁금해졌다.

편하게 나무길을 걸으며 찍은 사진. 곽지나 협재나 사진으로는 통 구분하기 어렵다.


걷다가 큰 바위로 만들어진 단이 보였다. 바다를 더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아 올라가 보려 했는데 동그란 덩어리가 철대에 매달려있었다. 이건 뭘까? 싶어 다가가보니 담배꽁초 먹깨비였다.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예뻤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리고 담배꽁초는 담배꽁초 먹깨비에게!


다시 걷다 보니 노천탕을 만났다.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노천탕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남탕과 여탕도 나뉘어있었다. 궁금증에 여탕을 들어가 보았는데 생각보다 대단한 건 없어서 아쉬웠다. 사실 노천탕에 쓰레기가 있어서 이용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예전에 홋카이도로 혼자 여행을 갔을 때(왜 난 매번 혼자지?) 노천탕을 이용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황홀한 기분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때의 기분이 오버랩 되다보니 더 아쉬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과물노천탕의 입구. 오른쪽에는 각종 조각상들이 있는데 이 사진에 담진 못했다.

이렇게 곽지해수욕장을 둘러보았는데 오후 5시가 되도록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카페에 들어가 책이나 읽다가 숙소로 들어갈까 했는데 배고프다는 요정님의 카톡을 받으니 나도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그래서 아무 데나 열린 가게를 들어가서 해물칼국수를 먹고 나왔다. 전반적으로 국물도 시원하고 맛도 좋았는데 홍합의 신선도가 살짝 아쉬웠다. 상했다거나 못 먹을 정도는 아닌데 좀 덜 싱싱한 느낌? 그래도 한 끼 잘 해결했다. 오션뷰를 보면서 1 인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부부였던 사장님께서 너무 친절하셨고 명절 잘 보내시라는 인사가 감사했다. 난생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설 명절인데 덕분에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곽지해수욕장 앞에 위치한 심야식당. 나는 해물칼국수를 주문해서 먹었다. 가격은 10500원.


든든하게 칼국수를 먹고 나오니 이제 기분 좋게 숙소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일부터는 설연휴니까 떡국이라도 해 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들어가는 길에 떡국떡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간단히 장을 보고(군것질거리도 샀다는 건 안 비밀)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은 바람도 많이 분 데다가 미세먼지가 심해서 다니기 불편했는데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일 보고 정하지 뭐. 혼자 여행의 최고 장점은 이런 거다. 완벽히 내 마음대로 모든 일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 일단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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