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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an 10. 2023

2. 법환포구, 서귀포터미널, 이마트 서귀포점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2) 동네와 친해지길 바라(230110)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미리 주문해놓은 쓱배송의 도움으로 밥과 국을 차렸는데... 이런. 반찬을 안 샀다. 밥에 국만 먹고 있자니 스스로가 너무 웃기기도 하고 그 와중에 둘 다 맛이 꽤 괜찮아서 즐거운 식사를 했다. 그리고 시작된 귀차니즘. 대충 동네 근처를 돌아다닐 계획이긴 했는데 일단 밥 먹으니 나른해져서 씻고 침대에 누웠다. 가만히 누워서 멍 때리고 있자니 손에서 진동이 울려댔다.


제주여행지킴이로 받았던 갤럭시워치를 이렇게 쓸 줄 몰랐다. 귀차니즘 만렙인 나를 일으켜 준 워치야 고마워^^....!


누워서 1시간을 보냈다니. 아무리 제주까지 내려왔다 해도 나의 빈둥대는 습관은 도무지 달아날 줄 모른다. 그래도 워치가 그만 일어나라고 보채준 덕분에 스트레칭도 마치고 밖을 나섰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를 우선 찾고 싶었다. 확인해보니 법환포구라는 곳이 있다던데 제주 올레 7코스와도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라고 했다. 당장 무슨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와 법환포구까지는 네이버지도로 30분 정도로 나왔는데 원체 걷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그 정도는 가벼운 산책이었다. 마음 편히 길을 나서보기로 했다. 길의 한편에 동백꽃처럼 생긴 꽃이 눈에 띄었다. 

동백꽃이 예뻐서 한 컷. 혹시나 동백꽃이 아니라면 말씀해주세요ㅠㅠ


그렇게 도보가 이어졌다 끊어지는 길들을 걷다가 이쯤이면 되었을까? 싶었을 때 법환포구는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주었다. 유레카였다. 워낙 길을 헤매는 편이기도 하거니와 제주의 첫 바다여서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법환포구의 첫 모습. 사진을 찍는 내내 바다에 반사된 햇빛이 너무 눈부셨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다.


내가 마주한 제주의 바다는 생각보다 진하고 파랬다. 동해바다는 에메랄드 빛이라면 제주는 좀 더 진한 파랑? 딥블루, 혹은 네이비 정도의 색감이었다. 아마 현무암이 비치면서 더욱 진하게 보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진한 바다를 마주하고 있자니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아는 것일까?' 나름 바다덕후라며 어느 여행지를 가든 바다는 꼭 보고 오는 나지만 그 많은 바다를 만났다고 해서 내가 바다에 대해서 정말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사람은 또 어떨까. 내가 아무리 오랜 시간을 지켜본 타인이라 해도 나는 과연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오만해지지 말자, 내가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자, 나는 여전히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내리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올레길을 짧게 걸었다.

 

법환포구의 끝없는 바다. 나도 바다처럼 넓은 이해심과 포용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다에게 또 배운다.


법환포구와 이어진 올레길을 짧게 왕복하고 나니 점심시간이 꽤나 지나있었다. 그 자리에서 무얼 먹어볼까 부랴부랴 찾은 뒤 주변 가게를 찾아 헤매었는데 세 군데의 가게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망연자실한 채로 지인에게 카톡으로 하소연하니 짤막하게 온 답장. '제주는 원래 그래.' 


그렇지. 나는 지금 서울이 아닌 제주에 온 것이었지. 나의 서울스러운 사고로 제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살짝 멋쩍은 마음도 들었다. 그렇지만 점심은 먹어야 하니 돌고 돌아 만난 로컬 맛집. 동환식당이라는 곳인데 그냥 문 열린 곳 아무 데나 들어가자는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제대로 된 제주 김치찌개를 만났다. 제주산 돼지고기가 푸짐하게 들어간 김치찌개는 허기진 배고픔을 달래기에 충분했고 맛도 좋았다. 바로 퍼주신 공깃밥의 비주얼과 특히 맛있었던 시금치는 지금 봐도 그 맛이 생각난다.

돌고 돌아 겨우 도착한 동환식당. 두툼한 돼지고기와 묵은지의 조합은 두 말하면 입 아프다.


김치찌개로 부른 배를 두드리며 슬슬 서귀포 터미널 방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도 도보로 35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그나마 길을 많이 헤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길 찾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서귀포 터미널 근처에 숙소가 위치해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행지를 이쪽에서 시작해야 했는데 대체 버스를 어디서 어떻게 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같은 버스 여러 대가 전광판에 보이니 더욱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버스를 타야 내가 원하는 관광지들을 둘러볼 수 있을지 터미널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냥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터미널이란 타 지역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찾는 곳이었는데 제주도에서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선한 사실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제주도는 생각보다 넓다는 걸 감안하면 한두 시간씩 버스로 다녀야 하니 터미널에서 시작하는 게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어차피 버스는 섬 안에서만 움직일 테니까 말이다. 내가 또 생각이 짧았다.

서귀포 터미널에서 내일부터 타고 다닐 101, 102, 201, 202번 버스 시간표를 찍어왔다. 아직 행선지는 정하지 않았다. 내일 눈 뜨면 정할 생각이다.


그래도 대략적인 버스노선과 시간표를 알게 되니 발걸음이 좀 더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바로 옆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평소에 비염을 앓고 있는데 이번엔 증상이 심해져서 겨울까지 고생 중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아침엔 두통도 있었다. 비상약은 챙겨 왔지만 혹시라도 떨어지면 낭패이니 약국이 보인 김에 여유분을 미리 사두고자 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위치한 이마트로 향했다. 이마트는 쓱배송을 이용하면 된다지만 계란이나 반찬은 배송되지 않아 직접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이글에 발라 먹을 크림치즈까지 찾으니 미션 성공. 그렇게 필요한 음식들을 들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사장님께서 건네주신 계란 하나(사장님 댁 닭이 오늘 낳은 계란이라고 하셨다. 너무 감사하게 받았는데 왠지 닭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뭘까?)와 귤 몇 알을 고이 데려왔다. 이후엔 씻고 밥 먹고 집안일을 돕고 논문을 보고... 여느 일상과 별 다를 바 없는 저녁시간을 보냈다. 여행과 일상이 단단히 얽혀있는 시간을 보낸다는 건 익숙하고도 낯선 일이지만 그럼에도 혼자서 이렇게 평온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긴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지금-현재인 나에게 집중해보고자 한다. 내일은 뭘 할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즐거울 거야. 


오늘의 주제가는 법환포구에서 들었던 자우림의 샤이닝, 그리고 나얼의 Missing you.

그리고 오늘의 교훈. 제주는 따뜻하지만 바람이 엄청 심하게 부니까 나같은 추위 개복치들에게는 롱패딩이 필수다. 그리고 선글라스도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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