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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Nov 26. 2023

의도된 공백

제주살이 일 년 반.

제주도 사람들의 지붕은 모두 하늘이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매서운 날에는 한없이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자연의 어둠과 폭력성을 받아들이며 안으로 안으로 파고든다. 이런 날에는 레드와인이나 값싼 위스키를 조심해야 한다. 허나 별다른 수는 없다. 온 우주엔 바람과 나뿐이다. 그저 틀어 놓은 재즈와 얼마간의 음료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혹은 잘못된 과거 회상에 빠지거나.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이내 핸드폰을 저 멀리 던져버린다. 펼쳐 놓은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흘러가는 밤을 그대로 둔다.


해가 모든 것을 격렬하게 비추고 공기가 코끝을 시원하게 찌르는 날에는 몸을 있는 힘껏 펼쳐 자연이 호소하는 찬란함에 공감하며 팔과 흉곽을 수줍지만 신이 나게 펼쳐본다. 이런 날에는 써지지 않는 글 대신 몸을 잔뜩 쓰는데 집중한다. 새별오름에 올라 저물어가는 갈대와, 해발 500미터 아래에 있는 여러 능선들과, 골프장과, 풍력발전기와, 파아란 바다를 바라본다. 엄마를 앞질러 터덜터덜 잘도 걸어 내려가는 아이를 바라본다.


대형 카페에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매우 거슬린다. 어느 순간부턴가 의도된 것들은 모두 진절머리가 난다. 고요함이 최고의 음악임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온다. 세상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는다. 오래간만에 목소리를 듣는 외삼촌이다. 이집트, 여수, 송도까지 밥벌이를 위해 기러기 생활을 해왔던 외삼촌은 오늘도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로 내게 안부를 묻는다. 삼촌, 벌써 사촌동생은 애까지 낳아 삼촌도 할아버지 되었네요.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며 살아가는 삶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생각.


이렇게 살다 보면,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건강해지고 활력을 되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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