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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Aug 08. 2019

나는 HOT의 팬이 아니었다

무한도전에 나오는 HOT를 보며

나는 HOT의 팬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인가 학교 앞 문방구에 HOT브로마이드가 크게 나붙기 시작했고,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이면 좀 '논다' 하는 아이들이 모두 HOT 춤을 선보여 열광의 도가니를 만들었는데... 나는 딱히 팬이 아니었다. 한편, 고등학교 때 우리 반 친구 중 한 명이 HOT의 초광팬이었다. 새 앨범이 나오면 선착순으로 주는 브로마이드를 받기 위해, 아프다고 둘러대며 조퇴하고는 음반매장으로 출동하곤 했다. 소장용, 음악 감상용, 분실 대비용, 혹시나 모를 예비용 등등으로 같은 앨범을 여러 개 사서 쟁여두었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는데, 어느 날 문희준이 공연 중에 무대에서 떨어졌다고 했나, 아무튼 크게 다쳤고, 그 일로 수많은 팬들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팬 중에 어떤 아이는 큰 충격과 깊은 슬픔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당시 기사를 검색해보니, 목숨을 끊은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실신한 학생들이 2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엄청난 팬덤이 사회문제로 이야기되는 지경에 이르자, 모 학부모 모임이 'HOT 해체 서명운동'을 한다는 풍문이 전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웃기긴 하다. 어른들이 애들 보호해야 한다며 아이돌 팀 해체 운동을 한다는 것이.


이때부터 우리 반 그 친구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HOT 해체 서명운동'의 '반대 서명운동'이 시작된 것.
말 그대로 학부모들이 하고 있다는 해체운동을 막겠다며, 선봉에 서서 열심히 활동했다. 등교하면 아침부터 서명 종이를 들고 온 학교를 휩쓸었다. 워낙에 포스가 강했던 친구라 열성팬이 아니었던 아이들도 그 친구가 들이미는 종이에 순순히 이름을 적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던 지라...!
열성 팬도 아닌 내가 왜 이름을 적어야 하며, 이런 식의 강압적인 분위기로 이름을 받아내며 세력을 만드는 것은 잘못되었고, 아마도 해체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런 너네 모습을 싫어하는 것일 거라며.... 살벌한 눈빛과 함께 서명을 거부했다. 그날, 팬들의 서명 강요가 문제가 많다며 천리안(아 옛날 사람) 게시판에 글도 올렸다. 그리고는 HOT 팬들한테 하루 만에 항의 메일을 수두룩 받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HOT는 추억 속의 하나가 될 무렵... 대학교 때 노동자-학생이 연대하는 모 집회에서 아글쎄! 그 친구를 만난 것이다. 한눈에 딱 봐도 그냥 너무나 열성적인 그 느낌적인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 뒤로도 뭔 시위 현장이면 여지없이 만났다. 무엇이든 몸을 사리지 않는 그 모습이 여전했다. 나는 학년이 올라가고, 주체에서 멀어지면서 시위에 띄엄띄엄 참가했지만, 어느 날 오래간만에 참가한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그 친구를  발견했다. '너 아직도 여기 있냐? 하하!' 괜히 웃으며 한마디 던졌는데, 그 친구가 웃음기 쏙 뺀 말투로 나에게 툭 던졌다.


 "아직도 여기 있냐고 웃는 네가 오히려 웃긴 거 아니냐?"

 

그날 저녁에 술기운을 빌려 폭풍 눈물을 흘렸다.

나는 무엇이든 늘 진심을 다해 열정을 불사르던 그 친구와는 달랐다. 친구의 그 말은, 늘 뜨뜻 미지근 슬그머니 한발 빼고 있던 나를 쿠쿡 찌른 말이었다. 민망함과, 미안함과, 부끄러움과, 그 열정과, 당당함에 대한 부러움... 뭐 그런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다들 졸업이니 취업이니 말하며 깃발 내려놓고 자기 자리 챙기러 떠날 때, 나에게 '네가 더 웃긴 놈이다'라고 말했던 친구는 그 후로도 그 자리를 지켰을까. 어릴 때부터 남달랐던 열정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을까...


무한도전에서 17년 만이라며 HOT가 나오는 날. 나는 열정적인 팬도 아니었는데, 괜히 뭉클한 마음이 들며 그 친구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 HOT 해체를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내 친구는 지금 어느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 시간을 되새기고 있을까...

 



HOT 공연이 설 전날에 펼쳐졌다고 한다. 엄청나게 많은 팬들이 공연 관람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팬들이, 시댁에서 전을 부치느라, 울며 보채는 아이를 돌보느라 눈물을 머금고 신청을 포기하는 댓글을 남겼다. 그들의 댓글에 왠지 찡했다. 삶에 치여 살아가느라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그 시간들이 한 번에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강타부인', '우혁부인'이라 칭하며 해맑게 웃던 아이들이, 'TV 앞에서 올림픽 경기에 환호하는 아무개'의 부인이 되어, 기름 먹은 머리칼을 넘기며 남의 집 전을 부치고 있다는 현실이 갑자기 너무 씁쓸하기도 하다.


* 오래전 ‘무한도전’에 HOT 나오던 시절에 작성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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