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점빵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Jul 29. 2020

운전을 시작하며 새삼 알게 된 다섯 가지

장롱면허 15년 만에 운전대를 잡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


부모님이 타시던 20년 된 차를 물려받아 면허 딴 지 15년 만에 노란 병아리 그림의 ‘초보’ 딱지를 붙이고 요리조리 다니고 있다. 간간이 몰고 나간 적은 있었는데, 명줄 짧아지는 느낌 때문에 포기하기를 반복하다 얼마 전에 큰 맘먹고(큰돈 들여), 연수를 받고 운전을 시작했다. 일상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요, 새삼 깨닫는 점들이 많아 요즘은 배움의 끝이 없다는 것을 크게 느끼며 산다.


1. 가르치는 일은 전문적인 일이다.

역시 뭘 배우는 건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한테 배워야 한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자들이 늘 하던, 그놈에 ‘감’을 익혀야 한다는 소리! 백만 번을 들어도 모르겠던 것들이, 나 같은 쌩초보를 수없이 보았을 강사를 만나면 단박에 이해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전문가를 만나자 정말 신기하게도 나갈 때 속도와 돌아올 때 속도가 달라져 있었다. 초보운전자를 위한 유튜브 영상에 '좋아요'가 수두룩  달린 댓글은 대략 “아버지한테 욕바가지 먹어도 모르겠던 것을 이제 알겠네요.”, “남편한테 감정 상해서 때려치우려고 했었어요.” 등등과 같은 내용. 혈육이나 지인에게 배우거나 가르치는 일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아니, 도대체 왜 모르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업이 왜 전문직인지 좀 알아야 된다고 본다.  


2. 에너지를 쏟으면 사랑하게 된다.

낡은 차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세워놓은 차여서 실내에 먼지가 떡이 되어 있었던지라, 청소는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차량용 물티슈를 사다 닦아내고 유막제거제와 발수코팅제를 사다가 수작업으로 닦아냈다. 유리창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말끔해졌다(실제로 엄마가 창문 닫으라고 했다. 닫혀있는데ㅋ).

오. 그런데. 그러고 나니 왠지 막 애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더니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마냥, 애정을 쏟고 나니 애정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자동차용품’ 카테고리를 밤새 들여다보다 ‘찜 목록’에 온통 자동차 세정제, 송풍구 시계, 차량용 무선충전기, 차량용 햇빛가리개, 자동차 방향제 등등으로 가득 채우게 되었다.

엄마가 달아놓은 촌스런 키링도 새로 바꾸고 싶어 인터넷 쇼핑몰을 휘젓던 어느 날. 자동차 번호판을 똑같이 닮은 미니 키링을 만들어주는 곳을 발견했다. 흰색, 노란색, 하늘색 번호판 사이에 나의 구식(!) 초록 번호판도 있었다. 상품 옵션에서 번호판 색을 고르는데, 아글쎄 나의 초록 번호판의 상품 옵션 이름이 ‘레트로 번호판’인 것이다. 레트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힙~한 갬성으로 통하는 그 레트로! 하하핫!!  낡고 오래된 차였던 부모님 차가 구슬땀 몇방울에 애정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나만의 '힙~한 레트로 자동차'가 되어버린 것이다. 손으로 펴야 하는 사이드미러와, CD도 아닌 카세트 데크, 지역명이 적힌 초록 번호판을 자랑스러워하며 레트로 느낌 풀풀 풍기며 다니는 중이다.


3. 일상에 문제랄 것이 없다. 사는 게 중요하지.

초반에는 심장을 두근거리며 길에 나섰는데, 이게 또 처음 가보는 길이 주는 긴장감과 몰입 덕분에 운전을 하면서 점차 스트레스 해소 효과를 얻는 느낌도 든다. 정신없는 일들과 수많은 고민들 사이에서 열을 뿜으며 하루를 보냈다? 시동 걸고 운전대 잡은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무에 중요했던가. 아까 나에게 상처 줬던 말? 앞차가 급브레이크 밟고 있는데 지금 그게 무슨 상관. 오늘 마무리 짓지 못한 일? 좌회전 신호 들어왔으니 일단 출발.

노란불이 빨간불이 될 때, 옆에 있던 버스가 밀고 들어올 때, 깜빡이도 없이 트럭이 등장할 때,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해야만 하는 내가 있을 뿐. 아등바등 하루 종일 지지고 볶던 그 많은 일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상태로 휘발되어 버렸다. 가끔 차 몰고 나가면서 스트레스 푼다는 사람들 이야기가 그저 바람 쐰다는 의미로 들렸었는데, 의외로 머릿속을 비우는 상쾌한 시간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조심히, 무사히 집에 도착하자.    


4.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길에 나서면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같은 상황도 다들 참 다르게 대처하며, 성깔 더럽고 무례한 사람과, 동시에 세상이 아직은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먼저 가겠다는 사람, 먼저 가라는 사람, 신호가 바뀌어도 안 가는 사람, 신호가 바뀌기 전에 이미 가는 사람... 초보 딱지에 대해서도 ‘알아서 피해주기 때문에’ 꼭 붙여야 한다는 사람과 ‘더 빵빵 거리며 화내기 때문에’ 붙이면 더 손해라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같은 사람이어도 운전하다 보면 ' 안에 내가 너무도 많은 상태' 되어 있기도 하다. 운전하면서 욕이 늘었다며,  그럴  알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고 친구가 이야기해주었다(개인적으로, 평소에는  그러다가 운전할  쌍욕 하는 사람은 거른다는 것이 나의 신조인데...)나는 내가 초보라는 생각 때문인지, 잔뜩 쫄아서는  안에서 나도 모르게 혼자 존댓말을 한다.

“아.. 아저씨 비키세요...”

“저기요, 지금 파란불인데...”

“아유.. 죄송합니다ㅠ”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나도 다양성 하나를 추가하고 있는 셈이다.


5. ‘여성도’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와 관련된 주제만큼 남성 중심적인 것도 없는 것 같다. ‘김여사’한테 '집에서 밥이나 하라’는 소리를 요즘에도 하려나 모르겠지만, ‘운전 저따위로 하는 거 보니 여자네’와 같은 소리는 은근히 주변 사람들에게서 종종 들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뒤차가 빵빵대거나 하면 ‘내가’ 운전을 못하는 것이 ‘여자가’ 운전을 못한다는 것으로 보일까 봐 신경 쓰일 때가 있다. 운전하는 사람 누구나 초보였던 적이 있고, 운전을 잘하고 못하고는 성별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런 말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더불어 자동차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에 ‘여성분들도 할 수 있다’는 멘트가 붙어있는 것을 정말 많이 보았다. 너무 많아서 콕 집어 말할 수도 없는데, 예를 들어, 셀프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것을 알려주는 영상이라면 ‘쉽죠? 무척 간단해서 여성분들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라고 한다거나, 코팅제 상품설명에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라서 여성분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식이다. 쉽거나, 힘들지 않은 일에 ‘여성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붙는 것은 불편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동차 관련된 일을 처음 접하면 어렵게 느낄 수 있고, 남녀 상관없이 힘이 세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므로, 그냥 ‘매우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힘이 약한 분들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좋겠다.


덧) 셀프 주유소는 긴장했던 것 치고는 너무나 쉬웠다.ㅎ ‘으른’이 된 느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HOT의 팬이 아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