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점빵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Aug 18. 2020

말 걸지 말아 주세요

   꽃샘추위가 몰아친 새 학기 시작의 날, 복도에 줄 서 있는 아이들이 침묵 속에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앞 친구의 네모난 국민학생(아! 옛날사람)용 가방에 '아기공룡 둘리'의 캐릭터 '희동이'가 새겨져 있었다. 맨 몸에 하얀색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아우. 희동이도 얼어 죽을 것 같지 않냐!"

   내 주위에 서있던 친구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옷을 안 입었어' 하는 반응을 보이며 하하호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런 유치한 대사로 웃었던 이유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였기 때문이다. 내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서먹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누그러지는 그 상황은 나에게 엄청난 뿌듯함을 남겨주었고, 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금세 친해지는 데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새 학기면 처음 만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이름을 묻고 농담을 던져대며 요즘 말로 치면 '핵인싸'로 자라났다.


   모임이나 연수의 첫날은 늘 그렇듯 공기 중에 어색함이 감돈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바꿔보겠다며 진행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서로 얘기도 좀 나누고 그러세요! 호호호' 하며 약간 톤이 높은 목소리로 말하면 다들 또 허허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나는 진행자의 이런 멘트가 있기 이전에 옆자리에 앉은 참가자에게 말을 걸어 괜한 소리를 하는 주체가 되어 있곤 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든 것일까, 아니면 정신머리를 차린 것일까. 지금은 그런 태도에 스스로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고 말을 건네는 것은 사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 재치 있는 한마디를 툭 건네며 분위기를 풀어주는 사람들은 나름 재능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 어려운 것을 어렵지 않게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고, 사회성이 좋다거나, 관계 형성을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친절하다거나 성격이 활달하다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붙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 말없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 살짝 건드려주면 와하하 웃어주는 사람들은 아니다. 때로는 그들이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 있는 것이다.

   ‘말 걸지 말아 주세요ㅜㅜ'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택시를 탔는데, 승객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건네는 기사님은 달갑지 않다. 내가 조용히 이것저것 살펴보고 사고 싶은데, 졸졸 쫓아다니며 상품 설명을 해주는 매장 직원은 솔직히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쉬는 시간에 미리 자료집을 읽어보고 싶은데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호구조사를 하는 옆사람은 좀 귀찮다. 혼자 있고 싶은 자녀와, 무슨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부모님은 갈등이 시작되고,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고 하이텐션으로 들이대는(!) 교사를 아이들이 늘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건네는 것도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 경계의 애매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조심스럽게 존재할 때, '쭈뼛거린다'는 딱지를 함부로 붙이고는 무턱대고 담을 넘어 돌진하면 부담스럽고 불편해지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궁금하지도 않은 호구조사나 실없는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나설 때의 마음이란,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이나 존중보다는 그 침묵의 어색한 공기를 감당하지 못해 내 위주로 흐름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일 가능성이 더 크다. 때로는 그런 행동이 무례함을 넘어 폭력이 되기도 하는 상황을 뉴스에서 볼 때가 있는데, 그저 말을 건넬 뿐이지만, 자신의 욕구대로 쉽게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의 힘이 작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 쉽게 말을 건네는 행동이 '당연히 좋은 행동'은 아닐 수도 있으며, 침묵과 고요함이 '누구에게나 안 좋은 느낌'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에 가지고 있는 공간은 담당자나 진행자가 구성원들에게 얘기 좀 하라고 종용하지 않는다. '먼저, 잘, 많이, 능숙하게' 말해야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는 세상에서, 구성원 모두가 안정감을 느끼도록 배려하는 공간은 언제나 '말하지 않을 자유'를 언급한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상황에서, 발표하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것을 선택할 자유, 그리고 그 자유를 모두가 인정하는 문화를 공유한다. 쉬는 시간이면 의미 없는 몇 마디를 나누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조용한 때를 보내도록 배려하고 진솔한 질문과 대답이 있을 때 함께 나눈다. 그러한 공간에 있을 때면, 옆사람과 나누는 침묵의 시간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진다.


   진실된 대화란 오고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연결의 느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연결이, 말을 건네며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말을 하지 않으며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일찍부터 알았더라면, 말없음의 공백을 깨려 안절부절 눈치 없는 농지거리 날리면서 핵인싸를 자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이다.



덧) 오늘 거기에 더해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을 함께 공유했다.

말하지 않을 자유와 함께, 말하지 않은 '내심'을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욕심내지 않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을 시작하며 새삼 알게 된 다섯 가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