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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Feb 20. 2022

풍경 너머의 사람 5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리를 걷자, 그제야 푸른 아침 빛을 받은 밀라노의 정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오모를 지나쳐 골목골목으로 들어가면 주변에 회사 건물로 추정되는 높은 빌딩들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건물들  층에는 카페며 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식당들의 간판과 밖에 내놓은 의자며 테이블 세팅을 유심히 살펴보며 아침 식사를  곳을 찾고 있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패션 스트리트에 입점해 있는 패션 브랜드들이 쇼윈도에 신경  행인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잡아 끄는 것처럼, 식당들도 외관을 봤을  느껴지는 기운이라든지  공간을 만들고 꾸려 나가는 사람들의 태도가 엿보일 때가 있다. 어떤 곳은 음악을 틀어놓거나 간판을 화려하게 만들기도 하고, 밖에 내놓은 테이블의 파라솔과 테이블 매트의 색을 화사한 파스텔 톤으로 일치시켜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색채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나는 기꺼이 흔들릴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럴  있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어떤 계획도 없이 그저 본능과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싶었다.


우선 관광객이 너무 많이 갈 것 같은 음식점은 피하고 싶었다. 여러 번의 해외여행을 통해, 나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식당을 더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로변을 벗어나 더 좁은 골목으로 여러 번 방향을 틀어 움직였다. 그러다 아주 작은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외관은 평범했다. 밖에 내놓은 테이블도 없었고 간판도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곳을 주목한 이유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 여럿이 줄을 서서 그곳에서 음식을 포장해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출근 전에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결하러 방문 포장을 해 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간단히 먹을 수 있으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팔 것 같았다.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줄 선 손님들은 그 식당의 주인이며 요리사, 서버와 살갑게 인사하며 서로 안부를 묻고 아침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단골손님이 많은 가게 같았다. 생전 처음 와본 공간에 주변은 외국인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느껴져서 나는 그곳이 금세 마음에 들었다. 그러자 나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같은 음식을 맛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어떤 메뉴로 하시겠어요?”


염색한 금발 머리에 멋들어지게 펌을 한 중년 여성이 내게 물었다. 새하얀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목에는 아름다운 하얀 진주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강인하고 완고해 보였는데, 눈빛에서 일면 따뜻함이 느껴졌다.


“햄 샌드위치에 오렌지 주스요.”

“알겠어요. 먹고 갈 건가요?”

“네.”

“그렇다면 저 안 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먹으면 편할 거예요.”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에 출입문 옆에 있는 테이블 근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니, 식당  쪽에는 전체  색과 같은 와인색으로 칠해진 작은 가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숨은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가벽 뒤로 가니, 벽을 따라  나무 선반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고  밑으로  형식으로  테이블이 있었다. 가벽  쪽에는 동그랗게 원으로  구멍이  있어서,  프레임 너머로 아까 내가 있었던 공간이 보였다. 그러자 얇은 벽을 하나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영영 다른 공간으로 와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막 없는 외국 영화의 유일한 관객이 되어 둥그런 스크린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


젊은 여자가 한 손에 쟁반을 들고 내게 다가와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는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벽 뒤로 사라졌다. 나는 메모장을 내려놓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이국적인 풍미가 물씬 느껴지는 햄의 향 뒤로 아삭한 채소의 식감이 느껴졌다. 채소 표면에 맺혀있던 차가운 물방울들이 혀 위로 기분 좋게 풀어졌다. 마저 한 입을 더 크게 베어 물자, 이번에는 목이 메어와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떠한 인공적인 향이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싱그러운 맛이었다.

     

나는 탐스럽고 단단한 생명이 나고 자란 풍경을 상상했다. 만약 과일과 대화를   있다면 묻고 싶어지는 맛이었다. 너는 어떤 햇빛을 받으며 자랐니, 어떤 물을 마시고 때로 어떤 바람을 맞으면서 이런 맛과 향과 색을 가지게  거니. 네가 자라난 곳의 낮과 밤은 어떤 색이니.  경계의 색은 어떠니. 너는 나무에서 자라나 사람의 손에 의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곳에 매달려 봤을 것이다. 너를 둘러싼 수많은 낮과 밤에 일어난 일들과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나는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며 주스를  모금   안으로 들이켰다. 과육에서 뿜어져 나왔을  맛이  위아래로 은은하게 맴돌았다. 어느새 식당 안은 조용해져 있었다. 일을 하는 사람들만이 식당에 남아 조용한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때로 침묵하며 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가 않다. 내 뜻과는 무관하게 누군가에 의해 인생이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무런 과정과 이유가 없는 결과는 없을 것이다. 오렌지의 남다른 색과 맛과 향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만나며 상상할  있을까. 내가 전혀 모르는 그를 둘러싼 풍경과 그가 자라며 겪었을 수많은 낮과 밤들을. , 그것들이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그의 마음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머를 가늠해보고 싶다. 묻고 싶어도 묻지 않으며 그저 느끼고 싶다. 나는 남은 주스를 마저 마셨다.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맛있는 오렌지 주스를  번이나  우연히 만나게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은 거창한 데서 나오는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붉은 벽지를 바른 식당을 나와 첫새벽이 지나간 아침의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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