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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Jan 29. 2023

꿈과 길

1.

가끔씩 학생 때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이번 주말에는 평일에 다 못 잔 잠을 몰아서 오래 자느라 여러 가지 꿈을 꿨는데, 마지막 꿈의 배경이 고등학교였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몇 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꿈속의 나는 학교가 끝난 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멘 채로 하교하고 있었다. 내 옆에는 한 친구가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 때 꽤 가까이 지냈지만 각자 삶의 행로가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이다. 십 년 만에 꿈에서 본 친구는 내게 이런저런 말을 하며 활짝 웃고 있었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오랜만에 본 그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2.

갈래길에서 헤어지기 전에 친구가 내게 말했다. “다음에 우리 놀러 가자!” 꿈속의 내가 대답했다. “그래. 곧 있으면 중간고사 준비 기간이니까(꿈속의 시간적 배경은 봄이었다.) 시험 끝나면 같이 놀자!” 우리는 그 대화를 끝으로 각자의 길로 사라졌다. 나는 머릿속으로 남은 기간 동안 공부를 어떤 순서대로 해야 하는지 열심히 계획을 짜며 집으로 향했다.


3.

꿈에서는 으레 그렇듯, 그 후 갑자기 시간적 배경이 졸업식 날로 바뀌었다. 재미있는 점은, 내가 꿈 속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는데도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어쩐지 처음 겪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학생들은 강당 앞으로 펼쳐진 긴 나무 의자에 앉아 훈화를 듣다가, 식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에 둘러 싸여 정신없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인사를 하고 포옹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헤어져 인생에서 영영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만 같아 활짝 웃었다.  



4.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꿈에서 깼다. 순간적으로 몇 분간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꿈에서 깬 나는 더 이상 시험도, 해야 할 공부도 없는, 학교를 졸업한 지 십 년도 더 넘은 성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웃기게도 이제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러자 모종의 해방감과 허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해방감은 그렇다 쳐도, 허탈함은 어디에서 오는 감정이란 말인가?


5.

그 꿈을 꾸고 나서 며칠간 그 시절의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다고 소망했는지 반추해 보았다. 고등학교 삼 학년 때, 대입을 앞둔 아이들은 시간이 나면 좁은 운동장을 자주 걸었다. 그렇게라도 불안감을 달래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직사각형의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았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고민이 많았다. 이제는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그 시절에 우리의 진로는 어른들의 말처럼 양분된 것만 같았고, 원하는 미래를 현실화할 수 있는 아이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까불거리던 한 친구가 수업 시간에 대뜸 선생님께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진지하게 질문했던 장면은 아직까지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6.

꿈과는 달리 요즘은 별다른 걱정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하고 싶은 취미도 하면서 일상을 꾸려나가고 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에는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별 탈 없는 소소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제는 안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고, 취향이라는 것도 생겼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가끔씩 이런 질문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정말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거냐고.


7.

얼마 전에는 회사에서 한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 산책을 했다. 혼자서 산책을 할 계획이었으나, 그가 먼저 같이 걷자고 제안했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원래는 관광객이 지나다니는 큰길을 쭉 걸었다가 돌아오려고 했으나, 그가 정혜샘 저 길도 가봤냐고 이리저리 물어서 우리는 어쩌다 보니 그가 제안하는 곳을 다 들르게 되었다. 눈이 쌓인 도서관을 걸으며 풍경을 예찬했고, 좁은 길목 옆에 있는 갤러리를 관심 있게 둘러보았으며, 사람들이 많은 아름다운 가게를 들러 중고책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렇게 삼사십 분 정도를 걷고 나서 우리는 웃으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짧은 모험을 한 기분이었다. 며칠 후, 그가 또 다른 동료와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며칠 전에 정혜샘이랑 점심시간에 같이 산책했는데 좋았어요. 그날 진짜 좋았어요.”


8.

이상하게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시큰거렸다. 시험도, 해야 할 공부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도 모두 사라진 인생에 남은 것은 내가 손으로 꽉 쥐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 아니라 어쩌면 하루하루를 그저 걷다가 마주치는 우연한 만남 혹은 모험과 같은 것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어느 순간에 만나 서로 좋아하는 것을 물으며 가까워지고, 고개를 들어 풍경도 보면서 그 순간의 마음과 감정을 나누다가 또다시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일상이, 현실의 이 삶이 굉장히 사소해 보이는 동시에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매일 지나치지만 선뜻 가보지는 않았던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걷게 될 때처럼. 만약 그때 그 친구처럼 누군가 내게 불쑥,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선뜻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될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 또 그 질문을 한 사람의 마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9.

시간이 흘러 오늘을 꿈으로 꾸게 될 날도 올 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웃고 있을까? 누구와 동행하며 무엇을 나누고 있을까? 삶에서 사라진 것과 새로 생긴 것들을 공기 중에 흐르는 바람처럼 바라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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