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시장 골목길에서 본 삶의 단면
출장 중 가장 생생한 ‘중국’을 만나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호텔 로비의 조용한 시계, 세련된 회의실,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라, 언제나 시장 골목에서였다. 어둑한 새벽부터 분주한 낮, 현지인들의 삶과 표정, 하루를 살아내는 기운이 밀도 높게 교차하는 그 공간. 나는 시장 골목에 발을 들이는 순간, 업무의 갑옷을 벗고 진짜 이방인, 진짜 관찰자가 된다.
광저우 출장의 어느 날, 숙소 근처 군서루 시장(群星路 시장)에 이른 새벽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상점 셔터는 닫혀 있지만, 청소부와 트럭기사, 손수레의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골목을 깨운다. 탁탁탁, 출근 준비하며 국수를 말아먹는 식당 아주머니, 꽈배기와 두유 팔러 나온 젊은 부부, 그 사이에서 아이를 안고 채소를 고르는 젊은 여인—골목은 그렇게 밤과 낮 사이, ‘분주함’으로 곧장 넘어간다.
이 시간 시장은 어떤 곳보다 솔직하다. 배달 물품을 쌓고 나르는 청년, 생선대야의 물을 쏟으며 고함치는 상인, 수도꼭지로 손을 씻는 아이들. 나에게 묘한 친밀감과 약간의 위화감을 동시에 던져준다. 바라보는 내가 그들의 일상과는 무관한 이방인이지만, 그 속에서 ‘나도 사는 사람’ 임을 느낀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 닭과 오리, 채소, 생선, 과일까지 각양각색의 상품들이 가판 위에 펼쳐진다. 길쭉한 칼로 오이를 토막 내는 할머니, 맥주병 세 개를 한 손에 잡고 결제하는 청년, 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는 쌀집 아저씨—모든 이의 손끝에는 뚜렷한 기술과 피로, 소소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십삼항 도매시장 골목, 한 아주머니가 작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매운탕 육수를 저으며 상인들에게 한 그릇씩 국물을 나누던 순간이다. 작은 가게 안의 웃음소리, 뜨거운 국물 한 그릇, ‘잘 먹고 힘내자’는 짧은 덕담. 거기엔 협력과 경쟁, 동료애와 소소한 질투가 동시에 공존하는 진짜 생활의 온기가 있었다.
시장 골목에서 만나는 상품들은 ‘진품’과 ‘모조품’의 경계를 흩트린다. 어설픈 한글이 써진 가방,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 최신 유행을 겨우 따라잡은 명품 가방 모조품. 하지만 현지 상인들에게 ‘짝퉁’은 범죄나 부끄러움이 아니라, 시대와 삶에 기민하게 적응하는 생존의 다른 언어였다.
오전 9시, 시장 골목 중간쯤, 스쿠터에 박스 가득 인형을 싣고 거래처로 이동하는 20대 남성. 그에게 “힘들지 않냐”라고 물으니 활짝 웃으며 “벌이가 변할 때도 매일 새로운 물건을 배우니까 지루하진 않다”라고 했다. 빠르게 바뀌는 트렌드를 몸으로 익히며 살아가는, ‘각자도생’의 용기와 초연함이 그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시장 깊숙한 곳, 야채 가게 옆 난전 앞에서는 아이들이 작은 화분 사이를 뛰논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혼자 노는 아이들, 서로 중국어·광둥어·가끔은 동남아 언어로 장난치며 낄낄댄다. 한 소년이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옆에서 장사하는 이모는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도와달라고 하면 새 공기(공기놀이용 구슬)를 주겠다!”라고 장난을 건넨다.
시장 곳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당근 주스, 튀김, 사탕이 소박하게 놓여 있다. 그 음식들, 그 소년들의 씩씩한 표정, 그리고 일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 거칠고 복잡한 ‘어른의 세계’와 해맑은 ‘아이의 시간’이 골목마다 공존한다.
점심 무렵 한 번 더 골목을 걷는다. 생선 비늘을 털다 미끄러진 할머니가 “오늘은 행운의 날이야, 미끄러졌으니까 돈이 많이 들어올 거야!”라고 주위에 농담을 던진다. 옆집 고깃집 사장은 소문난 불평꾼인데, 주문을 많이 받은 날엔 유독 목소리가 크다.
거래에 실패한 날에도, 팔리지 않는 재고 앞에서도, 시장의 상인들은 곧잘 덜컥 우울해지는 내가 이상할 만큼 (적어도 겉으로는) 금세 본래의 일상 템포로 돌아간다.
“손님, 오늘은 어떤 고기가 싱싱해?” 양어장 사장에게 물으니, 그는 “싱싱한 건 사람 마음이지, 고기야 늘 그날그날 그냥 그런 거야”라며 웃는다. 실없이 들릴지 모르는 그 한마디에, 나는 도시의 변화와 시장의 삶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계획과 예측, 트렌드와 분석이 파고드는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그냥 오늘 운이니까!’라고 웃으며 뜨거운 삶을 살아낸다.
광저우 시장은 곳곳에 동남아, 아프리카, 중동, 남미 이주민 상인들이 자리 잡았다. 땀 밴 거친 손, 익숙지 않은 중국어, 자신만의 향신료, 현지화된 사탕수수 주스 등. 서로 외국인임에도, 그들끼리 거래하고, 오후 4시쯤이면 구석에 앉아 짧은 휴식 중 소셜미디어로 가족과 영상통화를 한다.
나는 한 필리핀 출신 청년과 눈이 마주쳐 짧게 인사했다. 그는 두부구이 집을 이어받아 운영 중이라고 한다. “여기서 5년, 한국서도 살고 싶었다가, 지금은 그냥 가족이랑 시장에서 소박하게 보내는 게 꿈이에요.”
이방인에게도, 타지인에게도 시장 골목의 삶은 막막함과 희망, 적응과 포기의 교차점이었다. 각지 문화의 섞임이 ‘삶의 다양한 단면’ 임을 골목은 조용히 증명한다.
해가 저물고 골목마다 상점 셔터가 닫히기 시작할 무렵, 시장 입구 근처 포장마차 앞에 세 명의 청년이 모여 허름한 기타와 속삭임 같은 노래 한 곡을 선물한다. 저마다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한 상인이 손뼉을 치고, 옆집 할머니는 차를 권한다. 골목 어귀에서 파는 늦은 야식, 간이 의자 몇 개, 흥겨운 박수. 이 짧은 공연, 이 작은 이벤트가 힘들고 치열했던 하루의 피로를 말없이 녹인다.
출장 중 수많은 파트너들과 만나면서 깨달은 건, 비즈니스가 아무리 거대해도 그 바닥엔 항상 이런 시장 골목의 생명력—‘계속 달리고 살아남는 근성’, ‘지루해도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내는 긍정’, 그리고 ‘동료와 나누는 소소한 연대’가 존재한다는 것.
시장 골목에서 얻은 교훈은 책으로 정리한 분석과 다르다. ‘살아있는 경제’의 현장, 현재 중국의 맥박, 그리고 사람이라는 구체적 현실.
내가 출장에서 귀국할 때 가져오는 건 계약서 뭉치, 명함뿐만이 아니라, 매일 새벽과 저녁을 사는 이들의 치열하고도 단순한 웃음, 그 단단한 삶의 결이다.
출장이란 말 아래 나는 수백 번의 미팅을 했고, 수많은 수치를 외웠고,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의 숫자를 쌓았다. 그러나 오래 남는 인상은 언제나 시장 골목길, 아침이 오기 전 깨어난 거리, 손끝에 삶을 담는 상인과, 그 곁을 지나치는 이웃, 떠나온 이방인의 작은 호기심, 그리고 서로 다른 언어와 나이, 출신이 휘몰아치는 ‘오늘 하루의 단면’이었다.
언젠가 다시 광저우든, 상하이든, 베이징이든 돌아갈 때, 나는 또 그 골목길을 걷고 싶다. 바쁜 마음으로 길을 나선 출장자의 발걸음이 시장 골목에서 잠시 멈추어, 삶의 진짜 무게와 빛, 그리고 그 안에 숨은 작은 웃음을 오래도록 새기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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