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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May 23. 2022

Never Ending Peace And Love

네팔로 첫 해외봉사를 다녀오다

항상 웃고 있는 친구, 적극적인 학생, 말썽 한번 안 부린 딸, 헌신적인 애인이었던 나는 2016년 여름, 옥상에서 발견됐다. 병원에서 조울증이라고 했다. 공허해진 내게 의사 선생님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셨다. 나는 별 고민 없이 해외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쓰겠다고 꾸역꾸역 벌어 모은 그 적금을 깨고 지금의 내가 가장 필요할 곳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배낭을 메고 네팔로 향했다.



 

 네팔의 첫 풍경은 뿌연 먼지 속 어지럽게 펼쳐진 도로였다. 뒤엉킨 차들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내달렸다. (네팔에는 신호등이 없다.) 귀를 찌르는 경적소리에 몸이 움찔거렸다. 내 상상 속의 네팔의 이미지는 원만한 능선과 같은 나라였다. 눈앞의 네팔은 어린이가 투박하게 그려놓은 산처럼 뾰족뾰족했다.


 네팔은 ‘나마스떼’하고 인사한다. 존경하는 상대에게는 '나마스까르'라고 하기도 한다. 나마스떼는 정말 매력적이다. 발음은 매우 담백한데, 끝음은 치즈처럼 쭉 늘어난다. 엄청 화난 상태로 말해도 사람이 부드러워 보인다. 다행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과 마주치면 허리를 푹 숙이거나 고개만 끄덕이거나 손을 흔드는 등 여러 방식으로 인사하는데, 네팔은 언제나 두 손을 모아 인사한다. 아무리 내 손이 바빠도 인사를 하려면 두 손 모두 가슴팍 앞까지 가져와야 한다. 이 약간의 귀찮음이 인사하는 순간을 더 기분 좋게 만든다.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나마쓰떼다.  


 지난 2015 4 네팔에 대지진이 있었다. 7.9 규모의 강진에 수많은 사상자가 생긴 안타까운 재난이었다. 네팔은 건축물 안전관리에  비용을   없었다. 급속한 도시화로 내진설계가 되지 않은 주택들이 도심에 밀집되어 있었다. 때문에 지진의 피해는 더욱 컸다. 빠른 피해 복구는 물론 철저한 재난 예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힘겨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우리의 네팔 프로젝트는 아루가르까Arukharkha 마을에서 진행한다.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약 3시간 정도를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다. 교통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버스나 지프차를 대여해서 들어가야 한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루가르까는 대지진 당시 피해를 아주 크게 입은 지역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집이 흙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지진에 매우 취약했다. 접근성이 좋지 않다 보니 NGO의 피해 복구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주민들은 무너진 집을 고치고 있다. 한국인 팀원들은 2명씩 흩어져 홈스테이를 한다. 각 집에 직접 머물며 공립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게 된다.


 나는 부인솔자였던 민과 함께 너빈, 너비나 남매의 집에서 지냈다. 건물 짓는 일을 하는 빠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복구된 어여쁜 분홍색 집이었다. 마을에는 사립, 공립 딱 두 학교가 있었는데, 너빈과 너비나는 마을 언덕 위쪽에 있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우리가 활동하는 공립학교와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너빈과 너비나는 항상 내가 있는 공립학교 쪽으로 하교했다. 학교를 감싸고 있는 언덕에 앉아서 매일 나를 기다렸다. 우리 집은 학교와 가까운 편이었는데도 매일 나를 마중 나왔다. 그들을 발견하고 손짓하면 곧바로 수줍은 듯 몸을 배배 꼬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를 계속 바라봐준 것 같았다. 수업을 끝내고 나오면 어느새 교복을 갈아입고선 운동장까지 내려와 있었다. 한참 친구들과 놀고 있다가도 내가 나타나면 슬쩍 다가와 안겼다. 살아오며 계속 교육활동을 해온 터라 아이들에게 수없이 안겨봤지만, 유독 그 작고 짧은 포옹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이에게 사랑받으려 애쓰던 내게 그저 반가움만이 가득한 인사는 참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이때가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아, 남매가 머리를 싸매고 지어준 네팔리 남이름‘자야’다.

내게 안겨있는 너빈, 옆에 너비나




 아루가르까의 유일한 공립학교는 몇 년째 복구작업 중이다. 학생들은 절벽에 설치된 임시 건물에서 공부하고 있다. 제대로 된 지붕 없이 철판만 덧대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좁아서 교실 안에서 움직이려면 책상을 밟고 넘어가거나 아래로 기어나가야 한다. 학생들이 뛰놀 수 있는 운동장 또한 미처 다 치우지 못한 건물 잔해로 다 쓸 수 없었다.      


 나는 준, 빈과 함께 초등교육을 담당했다. 종이비행기도 버벅거리며 접는 나지만, 초등팀을 할 수 있던 건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꼬물거리는 손을 감싸 쥔 채 흙바닥을 마구 뛰어다니던 시간은 아직도 꿈만 같다.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을 아이들의 큰 아카 속에서 마주한 순간은 아직까지도 감사함이 벅차오른다. 이 아이들이 내 생에 가장 사랑스러운 인연이라고 확신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내 앞에 어떤 길이 있어도 조금 더 걸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리띡의 손을 잡으면 두 걸음 더, 프로절의 뽀뽀를 받으면 네 걸음 더, 기저귀 찬 아시사가 뒤뚱뒤뚱 걸어와 내 무릎에 앉으면 다섯 걸음 더.

 아이들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받았다. 직접 꺾어온 풀, 꾸깃해진 하트 종이, 구하기 어렵다는 과자 스티커, 그리고 평안한 쿠씨행복도 얻었다. 나는 끝까지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물론 같은 무게가 오고 가야지만 더 깊은 건 아니다. 그저 당시에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숙고하지도 못한 것이 부끄럽다.     


 초등교육활동은 예체능을 중심으로 준비했다. 언어 없이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술, 음악, 체육. 골고루 계획했으나 실제로는 거의 미술에만 치우쳤다. 초등팀에서도 중, 고등팀 학생들의 과학 실험을 쉽게 풀어 함께 했어도 즐거웠을 것 같다. 색종이, 종이컵 등을 쓰는 창작활동은 불필요한 쓰레기를 많이 만들었다. 마을을 걷다가 한글이 쓰인 쓰레기가 보이면 너무나 죄송스럽고 속상했다.     


 학교 시크사끄선생님들과 띄엄띄엄 나눈 대화들이 참 좋았다. 카드만두에서 파견되었다는 라모(항상 내니맥피스러운 코디를 항상 입고 계셨다.)께서는 우리의 모든 수업을 참관하셨다. 쉬는 시간에는 한국의 교육 현황에 대해 물어보셨다. 마침 교사 부모님의 딸이라 기뻤지만, 언어의 한계로 거의 콩트 보여드리듯이 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교류날 소고춤을 한바탕 추고 나서 지쳐 앉아있던 내게 초, 중등 시크사끄들이 쭈뼛쭈뼛 다가오셨다. 내게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혀줘도 되냐고 물어보셨다. 사실 너무 입어보고 싶었던 차라 백만 번도 입을 수 있었다! 어렵사리 사리를 다 입고 나타나자 시크사끄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데레이 쿠시츄정말 행복해”를 외치며 나를 안아줬다. 작별 인사하던 날에는 손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주고는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었다. 절대 잊지 말라며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해진 것 같았다.      

 



 아루가르까에서 만난 주민들은 정말 어른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오히려 꾸밈이 없었다. 우리 집 빠는 하루 종일 일했다. 퇴근 후에는 피곤하실까 조심하느라 가까워지지 못했다. 나눈 대화는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떠나기 전 날 빠는 집에 일찍 돌아왔다. 처음으로 우리와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그리고 카트만두까지 나가서 사 온 선물을 건네주었다. 띠까 스티커와 빨간 매니큐어, 빨간 립스틱이었다. 헤어지는 날에는 일까지 쉬고 버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약 1시간 내내 오르막길을 올라가야만 버스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나왔는데 그때까지 민과 나의 짐을 나눠 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 차가 마을을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보고 싶으니 꼭 전화하라’는 말과 함께. 그의 일상에서 우리와 관련된 모든 일은 굉장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 투성이었을 텐데 언제나 그 온화한 미소로 항상 우리를 위해 마음과 시간을 다 써주었다.


 우리 집 돌계단 (사실 절벽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경사였다.) 아래에 사시던 허주르부바할아버지는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에 기다렸다는 듯 풀다발을 건네주셨다. 아랫집 허주르부바는 우리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따뜻한 찌야를 내어주시고 손등을 쓸어주셨던 분이다. 작별인사 대신 '너희를 만나서 행운'이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이제야 이 글로 그들의 소중함을 구구절절 쓰고 있지만 그들은 직접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더 고마웠다.


처음 등교하던 길에 내게 녹내장 약을 부탁하셨던 비탈길 집 허주르부바는 마을에 있는 내내 쓰라림이었다. 이미 초점이 사라진 그의 눈을 바라보다 보면 내가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시렸다. 마지막으로 그 집을 지나치던 날, 그는 배낭을 멘 우리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큰 소리로 “던예밧고마워!”라고 인사했다. 나는 그에게 고마운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죄책감에 그의 집은 인사도 없이 빠르게 지나치기 바빴던 나였다. 아이들과 헤어질 때도 참았던 눈물이 그때 나왔다. 내 손은 그의 눈을 치료하지 못하지만 내 귀는 그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삼키면 끝인 약보다 언제든지 되새길 수 있는 위로가 더 진하다는 걸 마을을 떠나면서 어렵게 알아차렸다. 늦은 만큼 후회가 더 쌓인다.


 아이들은 우리가 떠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표현 없이 헤어져서 생각보다 덤덤했다. 오히려 이미 이 이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더 힘들게 헤어졌다. 카트만두 숙소 마당에서 한참 꽃 목걸이를 쥐고 있던 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까끼이모가 주신 꽃의 향기를 오래 기억하고 싶었단다. 아루가르까와 우리는 벌써 '위안'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내 삶에서 빠지면 큰일 날 것 같았던 그들은 벌써 하얀 그리움에 흠뻑 절여진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출국하는 날 친구 꾸망은 ‘추위도 소중한 조미료다.’라는 영화 대사로 나를 배웅했다. 새해 첫날 애교쟁이 하리를 따라 마을 꼭대기에서 감을 봤을 때에야 이 대사에 공감했다. 추위에 다 같이 몸 부대끼며 일출 소원을 빈 덕분에 올해가 더 든든해졌다. 사실 조미료고 뭐고 네팔의 새벽과 밤은 너무 너무 춥다. 아침잠이 제일 소중한 나는 해 뜨는 모습을 처음 봤다. 해는 늘 내 위에 있었고 정신없이 하루를 채우다 보면 어느새 해는 달로 변했다. 달 또한 여전히 내 위에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볼 수 있던 그 해는 평생 봐왔던 해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만물을 만드는 저 큰 존재가 닿을 수 없이 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하면 만질 수 있을 만큼 멀리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쓸데없는 투정들이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심지어 네팔의 해는 소원을 아주 시원시원하게 잘 들어줬다.      


 나에게 첫 네팔 프로젝트는 힘들게 애쓰지 않아도 바로 떠오르는 그리움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경이로운 히말라야 틈에 있었음에도 풍경보다 사람이 나온 사진이 더 가득한 나의 앨범처럼 참 맨도롱 따또따뜻한 경험이었다. Never Ending Peace And Love. 파슈파티에서 주워들은 이 말처럼 네팔을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새긴다.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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