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랑바레 증후군
2009년. 그때도 전염병으로 난리였다. 나는 당시 물에 데친 쑥 색깔의 교복을 입은 똑단발 중학생이었다. 그 해 초가을 감염자와 사망자가 늘어났다. 마침 2학기 개학 시기라 학교는 대혼란이었다. 학교는 매일 아침 학생들의 체온을 체크했다. 수치가 높으면 조퇴를 권장했다. 철없는 학생은 핫팩을 문지른 손으로 귀를 잡아 체온계를 속이기도 했다.
기말고사를 앞둔 학교는 거의 반나절을 써서 전교생에게 독감 예방주사를 맞게 했다. 오전수업은 전부 자율학습으로 대체되었다. 말이 자율학습이지 사실 자유시간과 마찬가지여서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다. 학교 중앙계단 벽을 따라 기다란 줄이 생겼다. 학생들은 차례차례 1층 도서관에 들어갔다가 다시 중앙계단을 통해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이 시절 이 학교는 '중앙계단은 교직원만 사용할 수 있다'는 괴상한 규칙이 있었다. 나 또한 선생님 심부름이 아니면 이용하지 못했던 계단이라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학생들은 일정한 타이밍에 도서관으로 들어갔다가 팔에 작고 동그란 캐릭터 밴드를 붙인 채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주사를 맞은 학생들은 반창고에 키티가 그려졌는지 뽀로로나 푸가 그려져 있는지 보기 위해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나왔다. 나도 팔에 붙은 곰돌이 푸를 보며 친구들과 '정말 곰이 꿀을 좋아하느냐'는 영양가 없는 토론을 하며 교실로 올라갔다. 2층에 올라갔을 즈음 뭔가 발목에서 어렴풋하게 찌릿함이 느껴졌다. 잠시 걸음이 어긋났다고 생각했다. 반이 있는 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다리가 점점 이상해졌다. 내가 걷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허공에 떠 있는 채로 휘적거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익숙지 않은 느낌에 놀라서인지 숨이 점점 가빠졌다. 고작 3층. 3층에 도착했을 때는 순간 걷는 방법을 잊은 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와 팔짱을 끼고 있던 친구 말로는 자주 넘어지던 내가 또 계단에 걸려 고꾸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쓰러져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심각성을 눈치챘다고 한다. 나 또한 예상치 못한 넘어짐에 침이 목에 걸려 컥컥거렸다. 그리고는 아주 잠시 동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듣기로 두 친구는 나를 일으키려고 했고 한 친구는 교실로 뛰어갔다고 한다. 친구와 같이 달려온 담임선생님이 왜 이러냐고 계속 물어보셨다는데, 신나게 곰과 꿀의 관계성에 대해 얘기하던 애가 갑자기 왜 쓰러졌는지는 친구들이 알 리가 없었다. 선생님은 날 어떻게든 일으키려고 애쓰셨다. 담임선생님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나보다도 훨씬 더 왜소한 체격이셨던 데다가 곧 정년퇴임을 앞둔 분이셨다. 놀란 나머지 누군가에게 부탁할 생각도 못하신 것 같다. 둘이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버둥거렸다. 결국 소음에 복도를 내다본 다른 반 선생님이 나를 들어 안고 계단을 뛰어내려 가셨다. 보건실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다시 본관 왼쪽 문으로 들어가야만 갈 수 있는 복잡한 동선에 위치해 있었다. 선생님께 안겨 내려간 나는 축 늘어진 채로 긴 대기 줄의 학우들을 전부 지나쳐야 했다. 불안한 걱정 섞인 소문을 증폭시키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보건실에서의 뚜렷한 기억 조각이 하나 있다. 부작용이 찾아온 학생들이 꽤 많았는지 시끌벅적하던 보건실이 내가 더 시끄러운 모습으로 들어오자 잠시 고요해졌던 순간이다. 한 학생은 두통으로 침대에 누워있다가 나 때문에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해야 했다. 파견 나온 보건소 직원은 내게 "어디가 아프냐"라고 물어보셨다. 답할 수 없었다. 마땅히 설명할 증상도 없었고 납득할 만한 전후 상황도 없었다. 직원은 침착한 얼굴로 '주사를 맞고 일시적으로 근육통이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학생은 좀 심하게 온 것 같다'라고 설명해주셨다. 얼떨결에 끄덕였지만 어떤 말도 이해가 되진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은 몸살난 것처럼 열기가 느껴지는데 몸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몸의 온도를 스스로 느끼는 순간이 없었음에도 그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점점 몸이 휑해졌다. 그리고 다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순간에는 왼쪽에서만 찌르르한 아픔이 날카롭게 휙 지나갔다. 순식간에 내 몸이 아픔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로 반 나뉘었다. 한 몸에서 '공허함'과 '날카로움'을 한 번에 느꼈다. 매우 소름 끼치고 무서웠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는데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냥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 커튼 뒤로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덤덤한 위로에 원망이 생겼다. 나는 지금 당장 이 괴상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나의 뇌에서 확연한 감각과 불명확한 감각을 동시에 저장했다. 슬슬 감각의 경계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눈물, 콧물이 나오고 몸은 부들거렸다. 보건소 직원이 슬쩍 내 상태를 확인하시고는 별말 없이 가림막을 치고 나가셨다. 잠시 후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담임 선생님은 휴지로 내 얼굴을 닦아주셨다. 아버지가 조퇴하고 데리러 오고 계신다고 했다. 여전히 안도감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조퇴까지 하셔야 하는 상황이라니. 일이 점점 커지는 만큼 내 상황이 더 심각하다는 말로 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 아버지의 직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 30분 안에 오셨을 것이다. 집 앞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나는 여러 검사를 받았다. 정말 여러 검사를 받았다. 시끄러운 원통에도 들어가고 여러 방향으로 뒤집혀가며 엑스레이도 찍었다. 팔 여기저기에 빨간색, 파란색 선으로 연결된 고무를 붙이는 검사도 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응급환자들 사이에 있으니 나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이런 여러 검사를 받을 만큼 아픈 것 같지도 않았다. 몇 시간 뒤 나는 '원인불명'으로 병원을 나왔다. 아마 내가 주사를 맞기 전에 긴장을 많이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근육이 놀랐을 것이란 소견이었다. 진단받기 전과 후가 달라진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서화되었다는 점뿐이었다. 병명이 없는데도 약은 처방 되었다. 내가 저리다고 말한 오른쪽 다리와 팔에는 깁스도 했다.
그 뒤로도 팔과 어깨, 손에는 무감각한 마비 증상이 느껴졌다. 특히 손은 펜이나 숟가락을 쥘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증상은 약으로도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나는 집에서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다. 교사이신 부모님은 큰 사유가 없는 한 매일 학생을 만나러 가셔야 했고, 학생인 나 또한 그런 선생님들이 계신 학교로 보내졌다. 충분한 설명 없이 사라진 내가 절뚝거리며 깁스를 하고 나타나자 친구들이 이것저것 물어댔다. 괜찮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학교에 왜 왔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못했다. 혼자서는 글씨도 못 쓰고 밥도 못 먹었다. 운동장에 나가지도 못해서 체육시간에는 빈 교실에 남겨졌다. 아버지는 매일 차로 운동장 구령대 앞까지 등하교를 시켜주셨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내가 꾀병이 아닐까 의심했다. 증상도 스스로 검열했다. 손도 꽉 쥐어보려 하고 걷는 것도 절뚝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버티니 학교에서 일주일 임시휴교를 결정했다.
휴교기간 동안에는 계속 물리치료를 받고 침도 맞았다.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아무리 옮겨 다녀도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도 나도 병명을 모르니 치료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쫙 펴지지도 꽉 움켜쥐지도 않은 상태의 오른손은 맨 손보다 붕대가 감겨있는 모습이 더 익숙했다. 오른손잡이였던 나는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먹었고 언제부터는 붕대 틈에 샤프를 끼워 넣고 글씨도 썼다. 그렇게 기말고사도 치렀다. 어느 날 병원에서 잠시 붕대를 벗었는데 내 손을 보고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그냥 맨 손이었는데도 내 몸에서 이어진 신체의 일부인데도 너무나 생소했다. 무언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기간만 길어지니 나조차 나의 아픔이 가짜 같았다. 생활은 여전히 그대로 불편했지만 점점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민망해졌다. 의사에게 나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어느 시기라고 딱 꼽지 못하지만 그동안 나는 깁스도 풀고 오른손으로 밥도 먹고 글도 쓰고 짐도 들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후 고등학교에서 악력 테스트를 할 때마다 체육선생님께 '쪽팔린 학년 꼴찌'(정말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불쾌한 놀림만 잠시 받으면 됐다. 주먹을 꽉 쥐지 못한다거나 조금만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툭 힘이 빠진다거나 때때로 손이 떨린다는 습관 같은 사소한 후유증만 남았다. 사실 후유증인 지도 잘 모르겠다. 후유증이란 어떤 병을 앓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병적인 증상이거나 어떤 일을 치르고 난 뒤에 생긴 부작용이라는데, 나는 어떤 병을 앓은 건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6년 후에도 후유증이 계속되자 다시 MRI를 찍었다. 겁을 잔뜩 먹어 쪼그라든 몸이 날카로운 소리에 둘러싸였다. 검사비도 저렴하지 않은데 또 이유가 없다고 할까 봐 불안했다. 통 밖으로 나온 환자가 울먹이며 나오자 치료사께서는 소리에 놀란 줄 알고 등을 톡톡 쳐주시며 휴지를 뜯어 주셨다. 검사실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님이 보시기 전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그제야 내가 '무섭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손뿐만이 아니라 어딘가 명확한 원인 없이 아프기 시작하면 진짜 아픈 것이 맞는지 스스로 검열하고, 충분히 혼자 회복할 수 있는데 못해낸 것이란 강박에 고통을 무시했다. 그만큼 나는 내 아픔, 특히 손에 대한 증상을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병원에서마저 진단하지 못하는 병은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약한 마음에서 나오는 꾀병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몸의 변화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 경련이 일어나거나 두통을 느끼면 증상과 별개로 공황으로 이어졌다. 한번 크게 공황을 겪으면 대부분 그때 하고 있던 일은 쉽게 다시 도전하지 못했는데, 입시미술이나 기구운동, 글쓰기가 그랬다.
2020년 10월 20일. 11년 만에 나를 괴롭힌 증상의 이름을 찾았다. 병원 진단서가 아니라 코로나19 백신으로 돌아가신 두 분의 기사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