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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올디 Aug 28. 2024

일을 열심히 안 했는데 최상위 고과를?

B급 인재가 되기로 결심하다

 J과장이 떠난 후 나는 셋업업무에서 교대근무로 업무가 전환되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 교대근무를 하면서 부서 후배들과 친분을 쌓았다. 사실 대부분 부서에 관한 불만을 얘기하면서 친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뭔가 자리를 잡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부서장과 다시 면담을 했다. 내가 교대근무를 그만하고 오피스 근무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무기력함을 느끼던 차에 잘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다음 달부터 나는 오피스 근무로 전환되었다.

 오피스 근무 기간 동안 부서 과장들은 나에게 끊임없는 증명을 요구했다. 해본 적 없는 어려운 업무를 덜컥 맡기기도 했고, 신입사원 육성을 명목으로 신입사원과 둘이서 많은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끼니를 거르며 일해야 겨우 끝이 나는 많은 업무량이었다.

 그 기간 동안 대체로 하루에 3~4건의 업무를 쳐냈다. 표현 그대로 쳐내기 바빴다. 분석이나 고민은 사치였고, 그저 내가 알고 있던 방식대로 쳐내고 안되면 그만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고, 많은 업무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셋업을 할 때보다 더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보람'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저 쳐내기만 하는 일은 나에게 전혀 '보람'이 없었다. 혹자는 '회사에서 무슨 보람을 찾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당시 나에게 '보람'은 꽤 중요했다. 근 2년 동안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에게 '보람'마저 없으니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고, 바빠서 그런 지 이번 1년은 더 빨리 흘러갔다. 다시 고과 면담 시즌이 돌아왔다.




 솔직히 이번에는 조금 기대가 있었다. 저번 셋업 때는 사고가 나서 못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사고도 없었고, 해낸 업무량도 꽤 많았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다들 이번에는 내가 꼭 받을 거라고 응원하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고, 내가 했던 업무들을 엑셀로 기록한 뒤 고과면담을 들어갔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상위고과는 주기 힘들 것 같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따지듯 되물었다.

 '이유가 뭔가요? 저는 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했는데, 어떤 점이 부족해서 못 받은 건가요? 고과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서장도 난감해하며 말했다.

 '정올디님은 충분히 잘했고,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상위고과 받을 수 있어. 근데 이번에는 어렵게 됐다. 미안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고과면담은 끝이 났고, 나는 더 이상 열심히 할 동력을 잃었다. 고과면담이 끝나고 나온 내게 다들 기대하는 눈치로 물었다.

 '이번에는 고과 받았지?'

 고개를 젓는 내게 다들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들의 당연히 받을 거라는 표정이 의문으로 변하는 순간 수치심과 억울함이 몰려왔다.

 '왜 나는 늘 이럴까. 나는 뭐가 부족할까.'

 열심히 했는데 에이스는커녕 상위고과 한 번을 받지 못하다니.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열심히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듬해가 되고, 나는 운이 좋게도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기존에 업무를 맡기로 했던 사람이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그다음 업무를 맡은 사람도 곧이어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면서 3순위였던 내가 맡게 된 것이었다. 중요한 업무인만큼 일도 기회도 많았지만, 나는 열심히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었기에 적당한 수준에서 업무를 진행했다. 물론 이전보다 업무량을 줄였어도 일이 많기는 많았다. 말 그대로 중요한 업무라서 윗선을 아예 무시하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여서 일처리가 늦은 탓도 있었다. 같이 업무를 맡은 후배와 함께 나름대로 이런저런 평가도 하고 분석도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갔다. 그 해 말쯤 되니 어느 정도 업무를 파악했고 일에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중요한 업무를 하면서 윗선에서도 나를 찾게 되었고, 업무 파악이 어느 정도 되니 다시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년을 거울삼아 오버페이스는 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은 흘러 고과면담 시즌이 되었다. 이번에는 큰 기대조차 없었다. 작년에 일을 많이 했는데도 상위고과를 받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핑계를 대며 안 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형식적인 면담이 진행되고, 부서장이 입을 뗐다.

 '이번 정올디님 고과는 최상위고과를 주기로 했다. 고생 많이 했고, 앞으로도 이렇게만 부탁한다.'

 어안이 벙벙했다. 일을 덜했는데 최상위고과라니?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별로 할 말도 없었고, 솔직히 기쁘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 인사를 끝으로 면담은 끝이 났다. 면담 후 생각이 참 많아졌다. 일을 덜했는데 최상위고과를 받고, 일을 열심히 했는데 상위고과를 못 받다니. 그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고, 그날 이후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에이스가 될 수 없다.'

 '나는 B급 인재가 될 거다. 누가 에이스일지는 모르지만, 묵묵히 1인분을 하면서 할 일을 하는 B급 인재가 되겠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겪고도 계속 회사에 몸 바쳐 일하는 에이스가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놀고먹는 월급루팡이 되기도 싫었다. 그저 누군가 부서를 끌고 가는 에이스가 있다면, 나는 그를 도와할 일을 하는 B급 인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큰 의미는 두지 않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대충 다니지도 않는. 내 연차에 맞는 업무 능력은 꾸준히 가져가는 그런 B급 인재.

 그날부터 나는 B급 인재에 대해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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