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올디 Sep 01. 2024

B급 인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내 회사 생활 콘셉트 잡기

 처음 최상위 고과를 받은 후로 고민이 더욱 많아졌다.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열심히 했을 때 최상위고과를 받았더라면 쭉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조금 내려놓은 상태에서 덜컥 최상위 고과를 받아버리니 뭔가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작년까지가 내 회사생활에서 가장 고민이 많았던 때가 아닌가 싶다.

 고과 면담을 끝낸 후 스스로 B급 인재가 되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사실 스스로 내린 정의 같은 건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예전에 어떤 선배에게서 들은 얘기를 가지고 혼자 막무가내로 내린 결론에 불과했다. 그래서 스스로 어떤 태도로 회사에 임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사람인지라 열심히 한 것에 대해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금방 지쳤고, 그렇다고 회사 내에서 아예 인정받기를 포기하면서 다니기는 싫었다. 좋든 싫든 회사는 내가 하루 중 1/3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곳인데 거기서 무시받으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랬는지 이때부터 나는 이직준비를 시작했다. 회사를 어떻게 잘 다닐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갑자기 다른 회사를 다니면 어떨까? 환경의 변화를 주면 어떨까?로 생각이 넘어간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최상위 고과도 받기 시작했고, 이대로 이직을 준비하기엔 아직 너무 가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회사에도 도움이 되면서 나아가 이직에도 도움이 되는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영어였다.

 나는 현장 엔지니어라 영어가 업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요즘 세상에 영어를 못하면 제약이 너무 많았다. 회사 연수 지원도 어학 성적이 필요했고, 사내 부서 이동 지원에도 어학 성적은 필수였다. 당연히 이직에도 어학 성적은 필요했다. 나는 지난 5년 간 어학 공부를 놔버렸기에 어학 성적은 진작에 만료된 지 오래였고, 그래서 영어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영어과외를 시작했다. 최근까지 하다가 그만뒀으니 장장 2년 이상을 한 셈이다. 회사 일과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왠지 모르게 이직에 대한 열망이 강해서였는지 힘든 줄도 모르고 공부했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몸은 매우 피곤해졌는데 반대로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안정감이 생겼다. 그저 회사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무언가 준비한다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영어공부를 하면서 회사 생활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 '에이스'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상위 고과를 회사 생활을 통틀어 단 1번 받았을 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이제 고과는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생활은 앞으로도 많이 남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긴 회사 생활을 조금이나마 보람 있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내려놓으니 안 보이던 것들이 더 잘 보이는 기분이었다.

 비록 저년 차지만 나름 회사 생활을 5년 이상 하다 보니 철학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겼다. 예전처럼 열정만 가지고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콘셉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B급 인재'를 내 콘셉트로 정했다. 그리고 이 'B급 인재'는 어떤 콘셉트인지 정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저 때 한 1년 간은 이걸 정의하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물론 생각은 자꾸 바뀌겠지만, 내 생각에 'B급 인재'는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이었다. 축구로 따지면 화려한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수비형 미드필더 같이 뒤를 받쳐주는 역할이고, 농구로 따지면 베스트 5 멤버가 아니라 든든한 식스맨 같은 역할이었다. 부서 내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맡은 바 역할은 잘 해낼 수 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않는 역할. 그것이 내가 가진 'B급 인재'에 대한 이미지였다. 특출 나게 잘하는 1개는 없을 수 있어도 모든 업무에 있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현장업무 내에서도 각자 역할 분담이 있으니 이것저것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이미 몇 개의 업무를 해 본 경험이 있었고 같은 연차에 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본 편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정도로 일을 해나가면 될 것이었다.

 무언가 나름대로 정의를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고, 일에도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의 목표는 더 이상 '에이스'가 아니기에 더 오버해서 일할 필요도 없었고, 주어진 일을 좀 더 퀄리티 있게 하면 되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나에게 큰 안정감을 줬고, 스트레스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직 생각과는 멀어지게 되었고, 그저 내 성장을 위해서만 영어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름의 콘셉트를 가지고 일을 하다 보니 또 1년이 훌쩍 흘렀다. 다시 고과 면담 시즌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부서장이 바뀌었고, 바뀐 부서장과 고과면담을 했다. 그분은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신 분이었다. 

 '정올디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중요 설비 맡아서 잘해주셨네요. 이제 2년 뒤에 진급대상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내년에는 진급 스트레스받지 말고 업무 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최상위 고과를 드릴 테니 앞으로도 업무에 집중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B급 인재'를 목표로 했는데, 최상위고과를 2번 연속받다니! 물론 내가 중요설비를 맡은 이유가 크겠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노력해도 받을 수 없던 고과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2번 연속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최상위 고과를 연속으로 받고 나니 뭔가 동기부여가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라기보다는 운이 좋아 중요 설비를 맡게 되었고, 마침 내가 진급이 얼마 남지 않아서 상위고과를 받아낸 느낌이었다. 'B급 인재'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지난 1년 간을 잘 다녀왔는데, 다시 새로운 고민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B급 인재'와 '동기부여'사이에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을 열심히 안 했는데 최상위 고과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