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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ul 07. 2019

어설픈 선한 마음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남들보다 꽤 일찍 드럼을 배웠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부터였으니 단순 경력연수만 놓고 보면, 올해로 무려 18년 차의 경력인 셈이다. (이렇게 한껏 허세를 부린다는 것은, 속이 빈약하다는 뜻이다.) 어른이 되면서 음악과 크게 관계없는 일을 해서 드럼과 멀어졌지만, 그 시절 연습의 흔적으로 지금도 양손 중지 안쪽 부분에는 굳은살이 남아있다. 그때는 나름 혹독하게 연습했다. 중학생 무렵에 특히 나는 진지했는데, 방학 중에는 매일 2시간씩 타이어를 치며 스트로크 연습을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개학하고 나서는 아예 타이어를 교실에 들고 가서 쉬는 시간마다 구석에서 그것을 쳤다. 드럼 스틱에 대한 감각을 익힌다고, 수업 시간에 몰래 손가락으로 스틱을 돌리다가 떨구는 바람에 선생님께 압수당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허세 유망주 시절이라 보면 되겠다.) 누군가 내게 꿈을 물어본다면 공공연하게 “밴드를 만들어서 공연하는 것”이라고 등등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축제가 올 가을에 있을 텐데, 하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지원해보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 가만있어보자. 내가 밴드를 만들어서 공연해도 되잖아, 라는 생각에 이르자 엉덩이와 마음이 들썩였다. 당시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가 마침 노래를 잘 불렀다. 보컬 해결. 일렉기타에는 같은 교회 찬양팀에서 기타 치는 친구가 적당하겠다. 기타도 해결. 피아노는 초등학교 때 함께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친구에게 부탁하면 되겠다.(당시 피아노 학원에서 몇 없는 남학생이어서 서로를 무척 의지했었던 기억이 난다.) 또 해결. (이 친구는 초등학생일 때 무려 체르니 40번을  자유자재로 연주했던 ‘피아노 신동’이었으므로 우리 밴드의 실질적 에이스로 모셨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문제는 베이스 기타였다. 학교를 통틀어도 베이스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애가 아무도 없던 것. 이를 어쩌나. 하던 찰나에 또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 못하면 가르쳐주면 되잖아!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보컬 친구의 도움으로 한 명의 친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그렇게 우리는 밴드가 되었다. 이름하여, VISION. (당시 후보에는 ‘프론티어’, ‘X-KOREA’, ‘드림’ 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이 됐든 참으로 안타까운 밴드명임을, 당시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몰랐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비전’ 밴드를 결성했으니, 이제 연습실이 필요했다. 우리는 학교 내 비어있는 교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번에도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보컬 친구의 도움으로 선생님을 설득해서 연습실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제 우리의 첫 미션은 베이스 기타를 맡은 친구에게 연주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성격도 호탕한 데다가, 공부도 곧잘 하는 친구라서 그런지 금방 연주법을 익히더니 고작 몇 주만에 한 곡을 연주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첫 데뷔곡은 무엇으로 할까. 나와 보컬 친구는 일본의 X-JAPAN이라는 락 밴드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들의 곡 중 <Endless Rain>이라는 발라드 곡으로 시작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아직 베이스가 서툰 점, 보컬 친구의 멋짐을 뽐낼 수 있다는 점, 화려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어딘가 ‘있어 보인다’는 점 등이 이유로 꼽혔다. 걱정과 달리 베이스 기타 친구는 생각보다 능숙하게 연주해냈다. 나를 포함해 기타, 보컬도 무난하게 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으니, 우리 모두가 의지했던 친구, 피아노 신동 친구가 계속 같은 부분에서 틀리고 말았다. 곡 중간에 피아노 솔로로 연주하는 파트가 있는데, 그 부분에서 자꾸 삐끗했던 것. 이제 역사적인 데뷔까지 고작 일주일을 앞두고, 여전히 버벅거리는 우리의 에이스에게 차마 뭐라 핀잔도 못주고, 괜찮다고 이미 수십 번이 넘도록 토닥였고,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과연, 우리 밴드의 축제 공연은 무사히 올릴 수 있을 것인가.


  이토록 길게 왜 내 이야기를 썼냐면,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기본 뼈대가 내 어린 시절의 흐뭇한 에피소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빼어난 구석 하나 없는 배 나온 중년 남성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수중 발레단을 이룬다. 2년 동안 어느 곳에도 취직하지 못한 백수 베르트랑(마티유 아말릭), 무척 예민하기만 한 로랑(기욤 까네), 오랜 무명시절을 보내며 캠핑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로커 시몽(장 위그 앙글라드), 파산을 앞둔 사장님 등등. 하나같이 수중발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간 군상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주어진 것. 바로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남자 수중발레 세계 선수권대회에 프랑스 대표로 출전해보라는 제안이다. 이제 겨우 수영을 할 수 있게 됐는데, 몇 분 동안 잠수를 하면서 다리로 발레를 해야 하니, 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벅찼을까. 이들은 그저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자’는 태도였다. 그런데 아만다 코치(레일라 벡티)는 이들을 그냥 그렇게 둘 수 없다. 그녀는 우리의 목표는 우승이라고 발레단의 방향을 확고하게 못 박는다. 입에서 단내 나는 훈련을 얼마나 했을까. 그들 자신조차 믿지 못했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그들은 결국 이루는 데 성공했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기억난다. 베르트랑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동그라미는 네모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 선언은 영화 중반까지 반복되는 것 같았다. 부박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던 이들이 수중 발레단을 한들 얼마나 잘할 것인가. ‘역시 동그라미는 네모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발레단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자신이 내뱉은 선언을 단번에 허문다. 그들은 연기를 하며, 각자의 팔을 내밀어 각진 동그라미를 만든다. 그러니까, 자신만의 방식으로 얼마든지 네모에 들어갈 수 있다고, 훈련을 하든지, 노력을 하든지, 자신의 성향을 바꾸든지, 무엇을 해서든지, 불가능해 보이는 ‘네모’에 동그라미는 들어갈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결국 이 영화의 최종 목표는 동그라미가 네모에 들어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이 팀은 그것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것은 감독 질 들르슈에게 뜻깊은 기획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영화로 처음 감독에 데뷔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이제 비전 밴드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우리의 첫 데뷔 무대는 잘 치러졌냐고? 우리 밴드의 실질적 에이스인 피아노 친구는 똑같이 그 부분에서 또 틀렸고, 틀리거나 말거나 계속 쳤지만, 또다시 틀렸고, 그 이후로도  몇 번을 계속 틀리는 바람에, 보컬은 들어갈 박자를 놓치고, 일렉 기타는 입을 벌린 채 손을 놓고 있었고, 그걸 보느라 나는 스틱을 떨궜고, 그러거나 말거나 베이스 기타는 계속 연주를 했고. 모든 것이 꼬일 대로 꼬이는 사이, 축제를 기획한 선생님이 황급히 무대로 나와 커튼을 쳐서 마무리되었다. 몹시 수치스러워서, 커튼을 쳐준 선생님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커튼 너머로 아이들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커튼 안에서 우리는 누구도 서로를 마주 볼 수 없었다. 


  당시에는 무척 아찔했는데, 어른이 되어서 돌이켜보면 실소가 슬금슬금 비집고 나오는 내 어린 시절의 일이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다섯 명 모두가 함께 커튼 안에서 수치를 견디던 그 짧은 시간이 무척 영화 같은 시간이라고. 급조해서 결성한 밴드가 입이 떡 벌어지는 공연으로 객석을 휘어잡는 것보다, 누가 먼저 나서서 위로를 하지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던 그 아찔한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아주 희귀한 일이 아닐까,라고. 그런 실패의 순간을 먹고 자라면서, 우리는 간신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라고. 결국 ‘비전’ 밴드의 휘황찬란한 꿈은 어설픈 자에게 쏟아지는 수치로 끝났지만, 이제는 그 어설픔이 무척 귀중하게 느껴진다. 어설픔은 최소한 무언가를 잘해보려는 사람이 가진 선한 마음이니까. 이런 선함은 미워하래도 미워할 수 없다.  





※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영화 정보








제     목 :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Sink or Swim

감     독 : 질 들르슈 Gilles Lellouche

국     가 : 프랑스

제작년도 : 2018년

러닝타임 : 122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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