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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Jul 31. 2019

비밀과, 비밀을 둘러싼 것들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에서

※ 결말에 대한 묘사가 조금 있습니다.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는 두 아이와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온다.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라우라는 문득 불안하다. 딸 이레네(칼라 캄프라)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라우라는 파코(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도움을 청해 필사적으로 딸을 찾던 중 발신인 미상의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딸을 데리고 있다. 경찰에게 알리면 죽이겠다.” 그들이 요구하는 금액은 30만 유로. 라우라와 파코는 이레네를 찾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다. 이렇게 줄거리를 요약했지만, 영화를 보면 이 문장들은 상당히 헐겁고 성글다. 영화에서 가장 활발한 동력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필 이레네가 납치된 이유, 결혼식 때 그 일이 일어난 이유, 친아버지도 아닌 파코가 이레네를 찾으려 목숨을 거는 이유. 그 모든 동력의 근원은 바로 ‘비밀’에 있다. 요컨대 이 영화는 ‘비밀’과 '비밀을 둘러싼 것들'에 관한 영화다.


  먼저 비밀. 영화에서 큰 비밀은 차례로 총 3번 등장한다. 첫째 비밀. 현재 안정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파코와 라우라는 과거 서로 연인이었던 것. 둘째 비밀. 이레네가 실은 파코의 딸이었다는 것. 셋째 비밀. ‘이레네 납치 사건’의 공범 중 한 명은 라우라의 언니 마리아나(엘비라 민구에즈)의 딸 로시오였던 것. 세 비밀 모두 영원히 은폐되지 않는데, 그건 비밀을 가진 자의 부주의함이라기보다 비밀 그 자체의 속성에 기인한다. 본래 모든 비밀은 영원히 가릴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스스로를 드러내고, 누군가에게는 스스로를 숨김으로써 비밀은 비밀로서 존재한다. 영원히 모두가 알지 못한다면, 애초부터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밀은 기필코 누군가에게 드러나야만 한다.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



  세 비밀 간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조금 흥미로워진다. 각 비밀은 다른 비밀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라우라와 파코가  과거에 서로 연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레네가 실은 파코의 딸이었다는 것. 이 두 가지 비밀은 결국 이레네의 납치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비밀이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탄생한다. (이 영화에서는, 마리아나의 입장에서 ‘이레네 납치 사건’의 공범자가 바로 자신의 딸 로시오라는 사실로 ‘비밀의 연쇄 과정’을 묘사했다. 로시오가 그들과 섞여있다는 설정은 극적인 설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비밀이 비밀을 잉태하는 과정을 담았던 것으로 보인다.) 드러난 비밀에서, 또 다른 비밀이 자신(의 비밀)을 은밀하게 도모하고 있었다.


   비밀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감추지만, 사람은 비밀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비밀을 마주한 그들은 모두 자신의 속내에 진실해진다. 비밀은 스스로를 은폐하고, 사람은 속내를 드러낸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지. 그는 현재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그가 결별하고 싶은 진실은 무엇인지 같은. 이레네가 괄호 안으로 들어간 후로부터, 각 인물들은 비로소 자신의 속내에 솔직해진다. 영화는 비밀의 자장 아래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응시한다. 첫째 비밀(과거에 라우라와 파코가 연인이었다는 비밀)을 알게 된 이레네의 표정은 조금 당황스럽게 굳었고, 둘째 비밀(이레네가 파코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베아(바바라 레니)는 멍했다. 이후 그녀는 애써 부정하려 하다가, 결국 파코를 떠나게 된다. 셋째 비밀(이레네를 납치한 공범자가 딸 로시오라는 것)을 눈치챈 마리아나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 (아마도 딸이 받을 처벌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밖에도 간접적으로 비밀의 자장 아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일 이후, 라우라의 가족은 파코를 노골적으로 의심하고, 또 누군가는 그 비밀을 통해 왕창 돈을 챙기려 들기도 한다. 비밀 앞에서 그들의 욕망은 서로 각축한다. 욕망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비밀은 유유히 그것을 내려다본다. 어쩌면 비밀을 비밀답게 해주는 것은 비밀 그 자체라기보다, ‘비밀을 둘러싼 것들’에 있는 게 아닐까.


  다행히 이레네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고, 라우라의 가족은 아르헨티나로 안전하게 돌아갈 채비를 한다. 뒷좌석에 앉은 이레네는 출발을 기다리다가 문득 묻는다. “아빠, 왜 나를 구하러 온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파코야?” 비슷한 장면은 바로 이어서 또 나온다. 끝까지 딸 로시오가 공범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마리아나는 자신의 남편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다. “할 말이 있어.” 두 대사는 비밀의 조짐같은 문장이다. '은폐-드러남'의 끝나지 않는 진자운동 사이에서 비밀은, 비밀을 둘러싼 것들과 함께 또 다른 비밀을 도모하는 중이다. 비밀은 모두가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2019.7.30.)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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