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식 Feb 11. 2020

희망은 불가피하다

영화 <주디>의 '양극적 시선'

희망은 불가피하다

영화 <주디>의 '양극적 시선'




   영화는 불가피하다. 인간이 한계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계 내에서 초월로 인간을 옮겨다 주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의 한계를 보면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게 되고, 인물의 실수가 해결되는 순간 자신의 잘못이 용서받는 느낌을 얻는다. 그러니 인간은 영화를 보면서 자신을 본다. 자신과의 마주함 없이는 죄의 자각도, 속죄도 있을 수 없으므로, 인간은 영화를 피할 수 없다.


   영화 <주디>를 보고나서 가장 유의미하게 시간을 보낸 일은 주디(르네 젤위거>와 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이었다. 주디는 내가 아니고, 나 역시 주디가 아니지만 나는 그가 마치 내 분신인 것처럼 친숙했다. 나는 영화 속 주디처럼 불안의 정서가 있었고,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견디기에 허약했다. 때로는 지금까지 애써 쌓아 올린 자신의 모든 성취를 단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마저 갖고 있었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는 스타였고 나는 아니라는 빤한 사실 하나가 우두커니 남아있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나를 봤다.




영화 <주디>



   영화에서 인상깊은 장면이 하나 있었다. 어린 시절 아역배우인 주디가 촬영하다말고 순간 수영장으로 뛰어들어간 쇼트다. 주디의 영화 제작사 사장은 살이 찔까 봐 케잌을 일절 금했고, 급기야 자신의 생일파티임에도 케잌을 먹지 못하자 주디는 홧김에 수영장으로 뛰어들어간 것. 이 수영장은 촬영 소품으로 특별 제작된 것이므로 수영장이라기보다 차라리 수조에 가까웠는데, 이 모양이 TV 브라운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메라는 이 쇼트를 마치 그곳 촬영 현장에 있던 카메라의 시점 쇼트로 담는다) 더욱 흥미로운 장면은 그곳에서 주디가 마음껏 헤엄치면서 활짝 웃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어쩌면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쇼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할리우드의 혹독한 시장 논리와 거대 자본 아래로 희생되는 인간 존엄의 가치를 주디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다. (주디 갈랜드가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의 나이는 무려 2살에 불과했다.) 욕망의 만족보다 욕구의 결여를 더 익숙하게 여기며 자란 주디는 어른이 되어서도 늘 타인의 사랑을 갈구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바랐고, (어린 시절과 달리) 자신의 본능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약물 중독이었다 한다.) 이 모든 자신의 한계의 근원이 (원하지 않게) 자신을 스타의 삶으로 살게만든 TV, 영화 매체, 영화 제작사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경멸하거나 분노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TV, 스크린,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한다는 역설. 아니, 거기에 있어야만 행복하다는 그 역설. 그녀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그 스크린 안에서의 삶이, 그녀에게 또 다른 삶의 희망과 안식을 건넨다는 것이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영화 <주디>



   프레드리히 휠덜린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위기가 가까우니 구원도 가까우리.”,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또한 자라나리니.” 이것은 위기와 기회가 동의어라는 의미다.  철학자 김진영은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라는 책에서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을 설명한다. “알레고리는 파괴와 생성, 무의미와 의미, 몰락과 구원, 무상성과 영원성, 고대성과 근대성 등의 양극적 대립 개념들을 극단적으로 껴안으며 밀고 나가 그 극점에서 논리적이 아니라 도약적으로 전복의 순간을 도래케 하는, 그렇게 하여 양극성 너머의 새로운 인식과 경험의 지평 영역이 열리도록 하는 벤야민의 사유방식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알레고리커는 따라서 동일한 대상과 현상을 형식 논리적이 아니라 모순 논리적으로, 즉 양극적 시선으로 응시합니다.”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주디가 어쩌면 ‘알레고리커’가 아닐까 생각했다. 좌절하는 것이 명확한 상황에서 그는 희망을 발굴해낸다. 절망과 유사한 감정들에게 그는 지배되지 않고, 절망 자체가 희망의 은유라는 것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벽을 보고있는 주디에게 영화 제작사 사장은 말한다. “벽 너머에 무엇이 보이니?” 주디는 모든 사물, 모든 상황, 사태를 겪으면서도 늘 그 시선은 그 너머로 향했다. 이것이 그가 절망에 쉽게 꺾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지개 너머의 그 어딘가의 세상(Somewhere over the rainbow)을 노래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절망은 불가피하지만, 영화도 불가피하므로 우리는 다시 속죄될 것이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렇게 말하자. 희망이 불가피하다. 

(2020.2.11.)



* 부기

2020년 2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디를 연기한 르네 젤위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야만 깨어날 수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