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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Mar 04. 2020

깜박임에서 출몰하는 삶의 진실

영화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의 관계


깜박임에서 출몰하는 삶의 진실

영화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의 관계




   영화에서 ‘영화적인 것’을 추려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문학에서 ‘문학적인 것’을 먼저 추려낸 신형철의 글을 본 이후부터다. 문학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으로 양분되는데, 그는 시적인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적인 것’이란 이런 것이다. 시적 발화는 ‘빈말’(하이데거)들을 뚫고 나와 격발한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5쪽) 시는 본질상 화자가 1인칭 자신일 수밖에 없고 시의 울림은 그 화자의 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뛰어난 시인들은 “이미지가 울리기 전에, 이야기가 설득하기 전에, 메시지가 가르치기 전에, 이미 그들의 발성 자체가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렇게 격발 된 발성은 끝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한편 소설적인 것은 무엇인가. 시가 목소리라면 소설은 행동이다. 어떤 행동인가. 자아가 자기 자신이 되는 행동(‘주체화’)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소설 속 인물들은 제 눈을 스스로 찌르면서 자기 자신이 되는 행동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소설적인 것이다. 


    문학은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실패의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 실패는 물론 이 세계의 허점이겠지만, 진실은 그 허점에서 출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솟아오른 진실이 바로 문학적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쯤에서 나는 눈치를 챘다. 그가 ‘문학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단순히 ‘문학’의 속성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고. 자주 엇나가고 미끄러지는 인간의 말과 행동, 그 실패의 자리(몰락)에서 일렁거리는 삶의 진실에 있지 않을까, 라고. 그래서 그는 문학을 윤리에 빗대어 이렇게 선언한다. 문학은 ‘몰락의 에티카(Ethica)’다. 



Tom Hunter



    그러니 영화에서 영화적인 것을 추리는 작업 역시 단순히 영화의 속성을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될 것이다. 말과 행동은 영화 속 인물들도 동일하게 하는 것이니까. 그들의 말 역시 숱하게 빗나가고 행동이 미끄러지니까. 그 어긋남과 무너짐 사이에서 영화 역시 삶의 진실이 겨우 떠오른다. 그러나 영화적인 것이 말과 행동,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영화는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글이지만 영화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에서 영화적인 것을 건져내려면, 일차적으로 영화만의 독자적인 속성을 추출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추출된 것을 삶의 진실이라는 필터에 한번 더 걸러낸 뒤에야 겨우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만의 독자적인 것에 대해 우선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성과 운동성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시간성

    시간성이라고 했지만 영화에서의 ‘시간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어떤 영화 속 장면이 그런 것처럼 서사의 빠른 진행을 위해 ‘몇 년 후’라는 문구 하나로 자유자재로 시간을 오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까. 글쎄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그것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우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분도 출판사, 2005)을 펼쳤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의 본질이 “시간을 빚어내는 것”(80쪽)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에게 영화란 어떤 특정한 시간을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그는 영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1895)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기차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당시 객석의 공포는 그만큼 커졌다. 관객들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바로 이 순간에 영화 예술은 탄생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미학적 원칙의 탄생이었다.” 어떤 미학적 원칙인가. “이 원칙이란 다름 아니라 인간이 예술과 문화의 역사에 처음으로 ‘시간'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이며, 동시에 시간을 반복해서 재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 즉 생각이 나는 대로 시간 속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이다.”(“봉인된 시간”, 76-77쪽) 그러니까 그에게 영화란 시간을 형상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어떤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그릴 수 있는 예술매체라는 것. 사람들이 언제든 영화만 보면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출입문 같은 것.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영화의 ‘시간성’은 들뢰즈가 말하는 ‘시간-이미지’ 개념과 같은데, 들뢰즈는 영화에서 ‘시간-이미지’와 ‘운동-이미지’를 이렇게 구분했다. (거친 요약이지만 과감히 시도해본다면) ‘운동-이미지’가 내러티브의 인과관계에 따라 일방향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시간-이미지’는 일직선적인 시간을 비틀거나 느슨하게 변형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시간-이미지’에서는 이야기의 인과관계보다, 한 개인의 감각, 정서적 측면이 중요하다. 뛰어난 영화 중 몇몇 장면에서 언뜻 맥락과 상관없어 보이는 쇼트가 돌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영화의 ‘시간성’은 감독 또는 영화 속 인물이 감각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이다. 그러니까 관객은 영화관으로 입장하면서 다른 시간으로 들어간다. 그 시간의 속도는 삶의 시간보다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다. 밀도 역시 느슨할 수도 팽팽할 수도 있다.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는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시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리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



운동성

    ‘운동성’이라고 했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영화 속 인물이 취하는 제스처에 있다. 이것을 ‘몸짓’이라고 하자.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인물의 몸짓이 영화에는 있다. 왜 몸짓인가. 여기에서 나는 스피노자를 떠올렸는데, 그는 정서가 몸짓의 변용이라고 이해했다.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131쪽) 정서란 몸의 작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이런 맥락에서라면 영화 속 배우들은 어떤 감정을 연기한다기보다, 어떤 몸짓(Acting)을 연기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때로는 파괴적인 동작으로, 때로는 관객도 알아차리기 힘든 고요한 움직임으로 영화 속 인물들은 자기 내면의 격량을 표현한다. 영화의 아름다움은 대개 이런 몸짓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를 향해 간절히 뻗은 희끗한 손이라든지, 쫓아오는 누군가를 피해 도망하는 발걸음이라든지, 헤아리기 어려운 슬픔이 문득 찾아왔을 때 멍하니 텅 비어있는 눈동자라든지. 영화가 클로즈업해서 그런 신체를 담아낼 때 관객이 보는 것은 그 신체 너머의 내면에 있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자적인 내면의 격량이 영화 속 인물의 몸짓 하나하나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영화의 운동성은 결국 한 개인의 영화적 내면성과 같다. 이때 한 사람은 하나로 존재하지만 그 내면의 너비는 영화의 모든 세계다. 만일 영화관에서 나온 관객이 영화 속 인물과 같은 몸짓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 정서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컨택트>



작은 결론 

    그러므로 영화적인 것은 ‘시간성’과 ‘운동성’의 합이다. 영화는 한 개인이 경험하는 특정한 시간의 질감을, 그만의 고유한 움직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커다란 스크린이 한번 깜박이는 동안, 우리는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이제껏 현실에서의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간과 몸짓이 영화의 세계에는 있다. 그곳이 실제적(reality)이 아니라서 기만인가? 영화는 물론 가상의 곳이지만 그 가상의 곳에 ‘실재’(the Real)가 있다. 영화의 윤리는 바로 그 가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실재와의 조우’(주판치치)에서 비롯될 것이다. 주판치치는 이렇게 덧붙였다. “실재와의 조우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된 물음 속에서 윤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4, 359쪽) 관객은 가상의 공간에서 영화에게 강제적인 질문을 받는다. “당신도 이런 시간을 겪어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몸짓을 취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인간의 깊이, 존재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 욕망의 좌절, 그리고 욕망의 광기. 저마다 삶의 진실을 담은 영화의 질문에 누가 쉽게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애초부터 이 질문은 대답을 듣기 위해 던져진 것이 아니라 묻기 위해 던져졌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제눈을 찌르면서 질문한다. 그러니 관객은 보기 어렵다고, 힘겹다고 영화의 깜박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 깜박임에서 출몰하는 삶의 진실과 만나기 위해 영화는 있다. 이것이 영화적인 것이다.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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